채성준 서경대 군사학과 교수 국방부 청렴국방위원
5월 15일 ‘스승의 날’은 1965년부터 세종대왕 탄신일(음력 1397년 4월 10일)을 양력으로 환산해 다시 정한 날이다. 세종은 한글을 창제하는 등 여러 측면에서 민족의 스승이지만, 군사전략가로서도 탁월했다. ‘스승의 날’을 맞아 세종이 4군 6진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보여 준 치밀한 전략과 정보활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파저강(일명 동가강) 일대에 사는 야인(여진인)들이 조선의 강계·여연 등지를 자주 침입해 인마를 살상하고 재산을 약탈했다. 세종은 이들을 무력으로 굴복시키겠다는 결심을 하고 정보 수집에 나섰다. 당시 여진은 올량합, 올적합, 홀라온, 알타리, 사롱합, 내이거, 오도리 등 종족이 다양했다. 하지만 조선은 그들이 어디에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정보가 거의 없었다. 세종은 전 소윤 박호문과 호군 박원무를 야인 지역에 파견해 산천의 험하고 평탄함, 도로의 굽고 곧음, 마을의 많고 적음을 파악해 오도록 했다. 이들이 40여 일 만에 돌아와 상세한 내용을 보고하자 본격적으로 정벌을 결심했다.
세종은 적의 허와 실을 모르면 시각·청각장애인과 같다면서 “우리 통사(通事·통역가) 중에 조심성 있고 빈틈없는 자를 뽑아 호복을 입히고 노자를 넉넉하게 주어라. 시간도 여유 있게 주어서 적의 사정을 탐지하게 하라. 또한 그 가족에게도 충분한 양식과 돈을 주어라”는 구체적인 지시를 내렸다.
또한 잔악무도한 적이라도 정보 가치가 있으면 살려 주고 우대했다. 여진족 추장 거아첩합을 사로잡은 함경도 절제사 김종서가 “그를 극형에 처해야 마땅하지만 야인들이 사는 여러 곳의 산천과 도로의 지형을 잘 알고, 다른 여진족과 교류가 깊어 정보 가치가 높으니 살려서 활용함이 좋겠습니다”고 건의하자 가족까지 한성으로 불러 기와집을 마련해 주고 종을 붙여 줬다. 그리고 한성에 오는 다른 여진족에게 집을 둘러보게 해 그들의 마음과 정보를 얻도록 했다. 병법에서 말하는 반간계였다.
반면 세종은 우리의 정보는 최대한 숨겼다. 여진족 정벌을 위해 몇 개월 동안 거의 매일 조정 대신들과 회의하고 현지의 지휘관과 정보를 교환하다가 느닷없이 충남 온양으로 온천 휴양을 떠났다. 왕세자, 왕비와 후궁을 대동하고 의정부와 육조, 군사책임자까지 호종하게 했다. 군의 출정 명령을 내리고 전쟁이 벌어질 수 있는 급박한 상황이었지만, 이 역시 정벌작전의 하나였다. 한성에는 귀화했거나 머물러 있는 여진족이 있었다. 이들이 여진족 정벌을 눈치채지 못하게 일부러 연출한 것이다.
세종은 그동안 조정 대신들과 숱하게 회의해 대책을 세웠고, 현지 장수들과 여러 차례 정보를 주고받았다. 군사 대비와 전략 등 후방 지원은 철저했고, 정벌 날짜도 대강 정해졌다. 시시각각 상황이 바뀔 수 있는 전투를 수백 ㎞ 떨어진 한성에서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었다. 현지 지휘관인 최윤덕 평안도 절제사에게 정벌의 공은 넘어갔다. 이제 장수와 병사들의 역량에 달렸다.
세종이 온천 휴양을 떠난 한 달 뒤 승첩의 제1보가 올라왔고, 계속 승리 소식이 전해졌다. 적의 포로는 236명, 사살은 183명이었다. 말과 소는 약 200마리를 노획했다. 그 외에 활, 창 등 병장기도 상당수 거뒀다. 집은 불태우지 말라는 명령이 사전에 있었기에 그대로 뒀다. 우리의 사망자와 부상자는 소수에 그쳤다. 파저강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4군 6진을 개척하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영토가 정해지게 됐다. 후손들이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세종의 업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