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안·공정성 생명… 인사전횡 등 싸고 ‘잡음’
정치권에 휘둘리지 않게 자정·시스템 정비를
국가정보기관인 국정원이 연일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내리고 있다. ‘막걸리 스파이 대 와인 외교관’ 충돌이라느니 조직붕괴, 조폭, 심지어 ‘김정은 기쁨조’라는 비아냥까지 나온다. 국정원은 그 전신인 중앙정보부가 1961년 5·16 군사정변과 함께 탄생하였다는 정치적 굴레를 안고 있다. 당시로서는 정통성이 취약한 상태에서 통치권 보좌 기능이 절실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국민들 간에 정권 유지의 수단이 아니냐는 의구심이 형성되어 있다. 민주화 이후 ‘역사바로세우기’나 ‘과거사 진상규명’ 등을 통해 그런 사실이 상당수 드러나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출범 당시부터 미국 등 선진국 정보기관을 벤치마킹해 북한 및 해외정보와 국내 보안방첩 기능을 갖춰 명실상부한 국가정보기관으로서의 면모를 갖췄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 현대사의 숱한 굴곡 속에서도 명칭 변경과 일부 기능 조정이 있었을 뿐 그 정체성이 유지되어 왔다. 이는 2차 대전 이후 신생 독립국 정보기관들이 대체로 정권과 명운을 함께 했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드문 일이다.
채성준 서경대학교 군사학과장
정보기관이나 스파이들은 ‘자랑도 할 수 없고 변명도 할 수 없다’는 숙명을 안고 있다. 세계 최고 정보기관인 CIA도 많은 과오가 있었고 실패한 경우가 허다하다. 그나마 성공한 것처럼 드러나 있는 것도 사실은 떳떳하다고 할 수 없는 해외 정치공작 사례들이다. 이란 팔레비 왕정복구 지원, 칠레 아옌데 정권 전복, 과테말라 쿠데타 지원 같은 것들이다. 반면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제거, 쿠바 피그만 침공, 이란-콘트라 게이트, 아프가니스탄 전쟁 개입, 한국전쟁 발발 정보 판단 실패, 9·11 테러 정보 실패, 이라크 대량살상 무기 허위 정보 등은 대표적 실패 사례다.
미국이 냉전시대에 소비에트 연방 체제를 붕괴시키고 오늘날 세계 최강 국가로 부상하는 데는 CIA의 공이 무엇보다 컸지만 그런 성공적 활동은 그냥 숨겨져 있다. 그렇다고 미국 국민들이 CIA의 위상과 역할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우리나라 역시 국가정보기관 설립 이래 많은 과오와 일탈 사례가 있었다. 그때마다 도매금으로 지탄 대상이 되기 십상이었다. 국정원발 이슈는 휘발성이 강한 대신 비밀정보기관의 특수성 때문에 진실보다는 뒷담화식 추측이 난무하기 마련이다.
최근 불거진 국정원 인사 소동이 언론을 통해 알려진 대로라면 문제다. 하지만 더 큰 잘못은 내부 사정이 외부에까지 노출되었다는 점이다. 정보기관의 생명은 비밀과 보안에 있다. 정보활동이 밖으로 드러날 때는 이미 생명력을 잃는다. 먼저 내부 유출자부터 찾아내 단죄하고 그 다음으로 문제가 있다면 절차대로 조사해 바로잡으면 된다. 미리부터 예단하거나 정치권까지 가세해 지나친 국정원 흔들기는 삼가야 한다.
오늘날 국력을 가늠하는 바로미터로 군사력 위주의 경성국력 못지않게 경제적 우위나 산업기술력과 같은 연성국력이 중요하다. 이는 그만큼 스파이들의 역할이 커졌음을 방증한다. 국가정보기관이 흔들리면 결국 좋아하는 것은 상대국이다. 이번 사태를 일부 정치권에서 국내정보활동 복귀 세력과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렇게 될 수도 없고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적폐청산’이라는 이름 아래 단죄되는 것을 본 직원들이다.
스파이의 삶은 영화 007시리즈의 제임스 본드처럼 정의롭고 폼 나는 게 아니라 평생을 익명 속에 악역을 도맡기 일쑤다. 스파이 세계의 모든 활동은 합법성에 근거하지 않고 합목적성에 따라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많겠지만 드러내놓고 나설 수 없는 처지다. 절대 대다수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하는 걸 숙명으로 알고 산다.
하지만 국정원 자체적으로도 더 이상 정치권이나 권력에 휘둘리지 않게 시스템을 정비해 모두가 승복할 수 있는 예측된 인사가 이뤄지도록 할 필요가 있다. 비밀정보기관은 다른 정부기관과 달리 언론 등 외부 감시에서 비켜나 있다 보니 인사 전횡 소지가 많다. 전 세계 어느 나라 정보기관도 조직, 인원, 예산을 공개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만큼 자정 기능이 잘 작동해야 한다. 선관위 인사 부정 사태를 타산지석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국민들도 이제는 지켜볼 차례다.
<원문출처>
세계일보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620516860?OutUrl=na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