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所願(소원)은 통일, 꿈에도 所願은 통일.”
한자세상
지금은 거의 들을 수 없지만 1960~70년대 행사에서 자주 불렸던 ‘우리의 所願’이란 노래 가사다. 所願이, 간절하지만 이루기 힘든 목표를 상정하는 느낌이라면 所望은, 달성 가능한 목표를 바라보면서 온 힘을 다하는, 실천적 의미가 짙은 단어다.
所望이 실천적인 만큼 환난은 필연이다. 『신약성경』 27편 가운데 절반 정도를 집필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환난은 忍耐(인내)를, 忍耐는 연단을, 연단은 所望을 이룬다”고 썼다. 결국 忍耐라는 실천적 고난을 통해 所望을 이룰 수 있다는 얘기다.
문제는 忍耐가 말처럼 쉽지 않다는 데 있다. 부처의 수행기를 적은 入菩薩行論(입보살행론)은 “성냄과 불만보다 더한 죄가 없고, 忍耐만큼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 없다”고 전할 정도다. 그래서 忍은 仁(인)과 통하고, 『論語(논어)』의 핵심 개념이 됐다. 개인에겐 德(덕)을, 공동체엔 인본주의를 이루는 근간이 仁인 셈이다.
忍은 자신에게 가하는 고통이라는 점에서 省(성)과도 연결된다. 孔子(공자)가 활약한 春秋(춘추)시대는 국가 통제력이 강화되는 시기였다. 周(주)라는 도시국가에서 출발해 春秋와 戰國(전국)을 거쳐 秦(진)의 통일국가로 달려가는 과정이었다. 이웃 간 감시 시스템인 五家作統(오가작통)도 이즈음에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孔子의 省은 이웃이 아닌, 나 자신을 향한 통제였다는 점에서 시대와 구별된다. 제자 司馬耕(사마경)이 君子(군자)를 묻자 孔子는 “안으로 살펴(省) 거리끼지 않으면, 무엇을 근심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랴(內省不疚 夫何憂何懼)?”고 답한다. 못난 사람을 보면 자기에게도 이런 못남이 있지 않나 자성하라(見不賢而內自省也)는 말도 했다.
所望의 절정은 베드로다. 광풍으로 요동치는 갈릴리 밤바다 위에, 두 발을 내디딘 자가 베드로다. 오직 예수에게만 所望을 두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베드로는 “오라!”는 예수 말 한마디만 믿고 바다로 내려섰다. 그 덕에 그는 최초이자 유일하게 물 위를 걷는 인간이 될 수 있었다.
코로나19는 이제 우리에게 일상이 됐다. 영원히 코로나와 함께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마저 떠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所望이다. 所望 속에 참고(忍), 살피며(省) 한걸음씩 나아간다면 코로나 따위는 소리도 흔적도 없이 소멸돼 버릴 것이다.
<원문 출처>
중앙일보 https://news.joins.com/article/23881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