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대한민국은 ‘고래 사이의 새우’ 신세다. 한 고래는 무기 배치를 이유로 몇 년째 이런저런 보복이다. 다른 고래는 돈 문제, 협정 문제를 들먹이더니 이젠 칙사를 보내 상대 고래의 장비를 쓰지 말라는 으름장까지 놓는다.
둘이 다툴 노릇이지, 왜 애꿎은 새우만 들볶는지 알 길 없다. 그 탓에 우린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처지가 됐다. 나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다.
進退兩難은 전쟁사(史)에 자주 보인다. 송(宋) 군사전략가 이정(李靖)의 저작 『위공병법(衛公兵法』은 전장(戰場) 속 병사들의 딱한 처지를 이렇게 한탄한다. “무릇 성을 함락하는 병사들은 進退兩難의 처지에 종종 처한다. 전진하자니 성벽을 오를 수가 없고, 그렇다고 후퇴하자니 장수의 칼날이 목에 닿을 것이겠기에(凡攻城之兵 進退又難, 前 旣不得上城, 退則其師逼追).” 삼국연의(三國演義)를 보자. 제갈량(諸葛亮)은 “주군께서 부관(涪關)에 갇혀 進退兩難의 처지에 계시니 신(臣)이 가지 않을 수 없었나이다”라며 유비(劉備)에 대한 충절을 토로한다.
우리도 제갈량처럼 뭔가 수를 내야 한다. 눈앞 상황에 몰입되면 묘수가 보이지 않는다. 북송(北宋) 시인 소식(蘇軾)의 충고를 들어 보자. “비스듬히 보면 고갯마루인데 옆에서 보면 봉우리다. 원근과 높낮이도 제각각이다. 노산 진면목을 알 수 없는 건, 내가 노산 안에 있기 때문이로다(橫看成嶺側成峰, 遠近高低各不同. 不識廬山眞面目,只緣身在此山中).”
한 걸음 비켜서서 각 고래의 특징과 욕망을 헤아려 보자. 모릉양가(模棱兩可)의 묘책이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모릉양가는 명확한 태도를 보이지 않고, 명확한 주장을 내놓지 않은 채 정반(正反) 모두에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한다는 얘기다. 비판의 뜻이 강하지만 양쪽 모두를 회유한다는 긍정의 뜻도 있다.
하나 묘수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당당함이다. 이치에 맞게 따질 건 따지고 말할 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오래 휘둘리지 않는다. "새우는 비록 작지만 큰 바다를 헤엄치니, 어찌 고래를 부러워하랴(其身雖小游泳大海何羨乎大鯨).”
옛 화공(畵工)이 새우 그림 옆에 적어 넣은 글귀다. 두 고래를 상대해야 할 우리에겐 한번 새겨 볼 만한 구절이 아닌가. 이런 자긍심이 있다면 십전십미(十全十美)의 묘책은 절로 나타날 것이다. 정부의 각성과 분발을 기대한다.
진세근 서경대 겸임교수·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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