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31번입니다.”
바늘구멍 대입 실기시험 현장 가보니
‘실용음악’ 간판 걸면 100대 1 넘어
K팝 열풍에 뽑는 인원 적은 탓
재수·삼수는 기본, 레슨비 눈덩이
재학생 “취업 어렵다는 것 알지만 하고 싶은 것에 젊음 걸고 싶다”
수험생 손모(20)씨가 피아노 앞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른 뒤 재즈 피아노곡 미쉘 카밀로의 ‘카리브’를 연주됐다. 1분 정도 지났을까 3명으로 이뤄진 심사위원석에서 “이제, 초견 보겠습니다”라는 주문이 떨어졌다. 손씨는 악보에 아무런 음표 없이 코드만 적혀 있는 걸 보고 건반을 눌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스윙으로 바꿔 해보세요”라고 심사위원이 말했다. 곡의 스타일은 재즈에서 스윙으로 바뀌었다. 실기시험은 1분 30초 정도 걸렸다. 지난 10일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 서경대 본관 8층 컨서트홀에서 열린 실용음악과 피아노 전공 실기 시험장. 피아노 전공으로 신입생 4명이 선발되는데 174명이 지원(43.5대 1)했다.
이날 실기 1차시험을 마친 손씨는 재수생이다. 지난해에도 이 대학을 포함해 여러 대학 실용음악과를 지원했는데 고배를 마셨다. 그는 시험장을 나서며 한숨을 쉬었다. “하루 7시간 이상 연습에 매달렸다. 초견 악보를 무리 없이 연주한 거 같은데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일단 2단계 선발(24명) 안에 들어야 2차 시험을 볼 수 있다. 그나마 다른 전공에 비하면 사정이 나은 편이다. 이 대학의 실용음악과 보컬전공은 3명 모집에 1863명이 몰려 621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2019학년도 수시모집에서 이보다 높은 경쟁률을 기록한 대학과 학과는 없다. 문수현(20)씨는 지난 7일 오후 6시쯤 수험생들 틈바구니에 섞여 실기시험을 봤다. 수험생이 많다보니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나흘에 걸쳐 실기시험이 이뤄졌다. 수시전형은 100% 실기시험으로 이뤄진다.
문씨는 “바브라 리카의 ‘런던 타운’이란 곡을 자유곡으로 선택했는데 이 곡을 고르기 위해 몇 달을 고민해야 했다. 그런 다음 이 곡을 두 달여 집중적으로 연습했다. 시험장에서 내게 주어진 1분 30초에 모든 걸 걸었다”고 말했다.
대입 수시모집 전형이 진행 중인 가운데 실용음악과 입시는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서경대를 비롯해 한양대 에리카(안산) 실용음악과 보컬 전공은 477.5대 1, 단국대 천안 생활음악과 보컬은 201.7대 1이다. 실용음악과 간판을 단 곳의 경쟁률은 4년제 일반대나 전문대를 가리지 않고 기본이 100대 1을 넘는다. 실용음악과란 클래식 위주의 음대와 달리 대중음악을 교과과정에 담은 학과를 말한다. 피아노·보컬을 비롯해 작곡·싱어송라이터 등의 세부 전공이 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오종운 종로학원하늘교육 평가이사는 “전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K팝 열풍이 반영된 것이긴 하나 실용음악과 보컬 전공을 둔 대학들이 각각 10명 내외의 소수 인원을 선발하다보니 경쟁률이 높게 나오는 현상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최근 들어 히든싱어나 프로듀스 101, 고등래퍼 등 대중음악을 바탕으로 한 예능프로그램이 인기를 모으면서 실용음악과를 도전하는 지원자들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최근 수시모집 실용음악과 실시시험에서 심사위원을 본 최태완(‘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밴드의 건반)씨는 “수험생 30명 중 1~2명 정도는 당장 프로로 활동해도 손색없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사상 유례 없이 입시 경쟁률이 치열하다보니 고교를 마치고 단번에 실용음악과에 합격하기란 쉽지 않다. 재수나 삼수는 기본이다. 지난해 602대 1의 경쟁률을 통과한 입시를 서경대 실용음악과 보컬전공 1학년 박라린(24)씨는 5수만에 합격했다. 인문계 고교를 다녔고, 고3 때 음악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는 “부모님이 반대하셨다. 그래도 이 길을 가고 싶어 부모님 도움을 받지 않고 온갖 알바를 하며 학원비·레슨비를 스스로 벌었다. 편의점 알바, 당구장 알바, 택배 상하차 알바까지 안 해 본 게 없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해 지난해 합격했다”고 말했다.
입시를 준비하는 시기도 갈수록 낮아져 중학교 단계에서 준비를 하는 학생들도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예술 분야 특성화 고교에 진학한 뒤 실용음악과로 가려는 것이다. 이런 덕분에 실용음악과 입시를 준비해주는 실용음악학원이 전국적으로 성업 중이다. 현재 실용음악과 입시학원은 J학원, M학원 등이 대표적이다. 여기엔 수백 명의 학생들이 몰린다. 한 대학의 실용음악과 관계자는 “최종 합격도 아니고 1차합격만 해도 학원 홈페이지 등에 합격자 명단을 띄워 홍보할 정도로 학원들의 경쟁도 치열하다”고 말했다.
대학들도 입시학원의 움직임에 신경을 쓴다. 입시 곡만 집중적으로 연습해 합격하는 걸 막기 위해서다. 학생들이 선호하는 실용음악과를 졸업하고 학원 강사로 뛰면서 입시 대비를 해주는 사례도 많다. 서경대 음악학부 배장은 교수(재즈 피아노 전공)는 “대학마다 차이가 있긴 하나 실기 시험에서 지정곡을 따로 두지 않고, 자유곡을 연주하게 하며, 초견 악보를 주고 연주해 실력을 보는 것도 이런 이유”라며 “현재 학생들의 실력이 과거에 비해 전반적으로 나아진 게 사실이나 초견곡을 연주시키면 보면 실력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경쟁이 치열한 만큼 입시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월 학원비는 30만~40만원 정도. 학원 강사로부터 직접 레슨을 받거나 학원으로부터 소개받은 사람에게서 레슨을 받을 때 레슨비는 한 번에 30만원이다. 이렇게 되다보면 수시모집을 앞둔 입시철엔 월 200만~300만원은 나간다. 올해 실용음악과 보컬을 지원한 한 수험생은 “돈도 돈이지만 어느 정도 해야 합격할 수 있는지 좀처럼 가늠하기가 쉽지 않아 답답할 때가 많다. 그래서 계속 도전할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일단 대학에 들어와도 등록금 부담이 뒤따른다. 실용음악과의 원조격인 서울예술대(전문대) 등록금은 연 892만원(대학 알리미 사이트 기준)이다. 다른 대학 실용음악과도 등록금 액수는 타 계열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다. 어렵게 대학을 다녀도 졸업 이후 취업은 쉽지 않다. 서울예술대 실용음악과 2016년 취업률은 55%였으나 2017년 취업률은 대학알리미 사이트에 집계돼 있지 않다. 박라린씨는 “취업이 어렵다는 거 알고 대학에 들어왔다. 젊은 시절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모든 걸 걸고 싶다”고 말했다.
< 원문 출처 >
중앙일보 https://news.joins.com/article/230437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