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모든 학교의 새 학기가 시작하는 3월이다. 그제 밤에는 창밖에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다. 일본의 새 학기는 4월이다. 그래서 새 학기엔 연분홍빛의 벚꽃이 활짝 피고, 꽃잎이 하염없이 흩날리는 언덕길을 걸었던 생각이 난다. 한국의 새 학기는 3월이라 날씨가 좀 쌀쌀하지만 물오르기 시작한 나뭇가지와 움트는 새싹에서 봄이 느껴진다. 이 두 가지 이미지를 함께 가지고 있는 내게 새 학기가 되면 언제나 봄처럼 화사하고 따뜻한 모습으로 떠오르는 한국인 두 분이 있다.
이즈미 지하루 일본 출신 서경대 국제비즈니스어학부 교수
그중 한 분은 일본에서 내게 처음 한국어를 가르쳐주신 교수님이고, 다른 한 분은 한국에 오던 날 비행기 옆 좌석에 앉았던 아저씨다. 1979년 나는 고향에서 고교를 졸업하고 도쿄의 디자인회사에 근무하다 대학에 입학했다. 사회학을 공부하던 중 한국에 흥미를 갖게 됐고, 한국어 수업을 듣게 됐다. 그 과목을 담당했던 분은 당시 52세의 류상희 교수님이었다. 당시는 지금과 달리 한국어가 인기 과목이 아니었고, 수강생은 나를 포함해 고작 4명에 불과했다.
‘가나다라’로 시작한 한국어 수업이었다. ‘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 ‘송아지 송아지 얼룩송아지….’ 지금도 혼자서 흥얼거리는 이 동요들도 류 교수님에게 배웠다. 이때 배운 동요들을 생각할 때마다 교수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취업 등으로 다른 학생들이 수업에 나오지 않게 되자 학교 앞 찻집에서 교수님과 나만의 강의가 이어지기도 했다. 한국어 발음이 섞인 일본어로 교수님은 말뿐만 아니라 한국의 문화, 사회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주셨다. 정말 따뜻하고 속내가 깊으시며 겸손하셨다. 내게 한국으로 교환학생 등 유학을 권하신 분도 교수님이었다. 만약 교수님이 안 계셨다면, 현재 나는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다른 한 분은 1985년 3월 말 내가 처음 한국으로 오던 날 하네다에서 김포공항으로 오는 비행기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아저씨다. 아저씨는 유창한 일본어로 말을 걸어왔다. 교환학생으로 서울의 어느 대학에 가며 그날 밤 숙박할 곳조차 정하지 못했다는 얘기를 나눴다. 저렴하다는 이유로 내가 선택했던 마지막 비행기가 김포에 도착한 것은 늦은 시간이었다. 공항 밖은 매우 어두웠다.
젊음은 이런 것일까. 몇 마디밖에 말하지 못하는 서툰 한국어 실력이었지만 두렵지 않았다. 아저씨는 집이 공항 근처에 있고, 집에는 나와 비슷한 나이의 딸이 2명 있으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자고 가라며 다음 날 학교에도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몇 번을 거절했지만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며 아저씨는 재차 권유했다.
김포공항 밖으로 나와 보니 서울의 밤은 맑고 쾌청했지만, 서늘한 봄기운은 나를 살짝 위축시켰다. 나지막이 이어진 건물의 네모난 간판에는 온통 한국어뿐이었다. 그래도 같은 한자 문화권이기 때문에 한자 표기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가로등 불빛에 온 천지가 낯선 오렌지색으로 보였고, 비로소 내가 외국에 왔다고 느껴지면서 슬며시 겁이 났다.
결국 나는 친절한 아저씨 덕분에 한국에서의 첫 밤을 따뜻한 온돌방에서 보낼 수 있었다. 다음 날 따님의 도움으로 유학 온 학교에 무사히 도착했다. 아주 창피한 얘기지만 그때 경황이 없어 이름도 연락처도 못 챙기고 외국에서의 생활과 학업에 바빠 감사 인사도 제대로 드리지 못했다. 이후 지금까지 새 학기에 일본에서 오는 유학생을 볼 때마다 아저씨를 떠올리게 된다.
이즈미 지하루 일본 출신 서경대 국제비즈니스어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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