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박의 ‘담’은 묽다는 뜻이다. 짙거나 빽빽하지 않고 오히려 싱겁거나 묽거나 옅은 것을 말한다. 담박의 ‘박’은 ‘머문다’는 뜻이니 담박은 ‘묽은 상태에 머물다’쯤 되겠다. 욕심·집착·꾸밈 같은 말과 반대편에 선 개념이다. 그래서 담박은 선비의 용어다.
삼국시대 촉(蜀)나라 재상 제갈량(諸葛亮)은 담박을 사랑했다. 그는 계자서(戒子書)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담박하지 않으면 뜻을 밝게 가꿀 수 없고, 고요하지 못하면 큰 뜻을 이룰 수 없다(非淡泊無以明志,非寧静無以致远).”
제갈량의 담박론이 절실하게 울리는 이유가 있다. 제갈량은 평생 촉을 위하여 몸을 바쳤다. 집안과 자식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그는 말년(234년)에 여덟 살 난 아들 첨(瞻)에게 이 글을 남겼다.
정약용도 담박을 사랑했다. 그는 아예 ‘담박함을 즐기다’는 글도 남겼다. “담박함을 즐길 뿐 아무 일도 없지만/ 타향에서 산다 해도 외로운 것만은 아니네/ 손님 오면 꽃그늘에서 시집을 함께 읽고/ 스님 떠난 평상 가에서 떨어진 염주를 발견하네/(중략) 우연히 다리 위에서 이웃 사는 영감 만나 배 하나 띄워 놓고 취하도록 마시자 약속했네.”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 역시 담박함을 즐겼다. “사람을 만나면 담박한 맛으로 대하고/ 술을 마실 때 순하고 부드러운 잔에 담아 마신다네(曷若飽人以淡泊之味, 醉時以淳和之觴).” 대렵부(大獵賦)라는 장문의 시의 한 구절이다. 송나라 시인 구양수(歐陽修)도 “세상은 참으로 맵고 짜구나/옛 맛은 역시 담박이 으뜸이라(世好竟辛咸, 古味殊淡泊)”고 노래했다.
이래저래 고단한 세월이다. 몸 하나 편히 뉘일 곳, 마음 한쪽 편히 쉬게 할 곳이 없다.
이럴 때 담박을 떠올려 보면 어떨까. 작가 정여울은 “더욱 담박하게, 더욱 소소하게 내밀하게, 우리가 이미 마음 깊숙한 곳에 각자 지니고 있는 행복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오늘이 되었으면…”이라고 소원했다. 이 말이 우리 모두의 소원이 되기를.
진세근
서경대학교 문화콘텐츠학부 초빙교수
<원문 출처>
중앙SUNDAY http://news.joins.com/article/218193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