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성준 서경대 군사학과 교수, 안보전략연구소장
새해가 밝았지만 국가 안보 법제는 여전히 걱정스럽다. 1953년에 제정된 형법(제98조)상 간첩죄는 그 적용 범위를 ‘적국(敵國)’으로 한정하고 있어 변화한 안보 환경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그나마 지난해 11월 이를 ‘외국’으로 확대하는 개정안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 제1소위원회를 통과했으나, 더불어민주당의 갑작스러운 입장 선회로 답보 상태여서 아쉽다.
그동안 잘못된 간첩 조항 때문에 안보에 구멍이 뚫린 사례가 허다하다. ‘정보사 군사기밀 유출 사건’을 간첩죄로 기소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 중국인들이 국가정보원과 미국 항공모함을 드론으로 촬영하다 적발된 적이 있지만, 항공안전법이나 군사시설보호법 위반 적용을 받을 뿐이다. 중국의 반(反)간첩법은 국가 안보·이익과 관련한 문건·데이터 등을 취득하거나 주고받아도 간첩 행위로 처벌한다.
가장 심각한 것은 산업 기밀 유출이다. 우리는 K-방산을 비롯해 세계 최고 수준의 첨단 기술력을 보유한 나라다. 국정원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총 106건의 산업 기술 해외 유출 사례를 적발했는데, 그중 50개 기업의 연구·개발비와 예상 매출액 등을 토대로 한 피해액이 20조2114억 원 정도로 추산된다. 군사기밀보호법이나 산업기술보호법, 방산기술보호법 등이 있지만, 간첩죄에 비해 형량이 낮아 대응에 한계가 있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국정원의 대공수사권 폐지 1년이 지난 시점에서 간첩 수사 역량이 현저히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국정원이 지난 2022년 민주노총·창원·제주 간첩단 사건을 수사하면서 북한 연계 혐의자 100여 명을 포착하고도 수사를 진행하지 못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2∼3년 추가 수사하면 간첩단 조직의 실체를 규명할 수도 있는데 안타깝다.
그동안 경찰도 대공수사 역량 보강을 위해 조직과 인원을 확충하는 등 노력을 해왔다. 북한 정찰총국에 미사일 등 첨단 무기 제조에 활용되는 핵심 기술을 넘긴 70대 사업가를 간첩 혐의로 적발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국정원처럼 해외정보, 대북정보, 휴민트, 공작기법, 수사장비 및 수사비 구축이 갖춰지지 못하다 보니 여전히 어려움이 크다.
대공수사는 관련 범죄 혐의에 대한 증거 수집부터 혐의자 내·수사에까지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소요된다. 대공수사권이 없어진 지금 국정원은 ‘해외정보원’에 불과하다거나 심지어 ‘물정원’이라는 푸념이 터져 나올 지경이다. 북한의 러시아 파병과 미국 우선주의(MAGA)로 재무장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출범(오는 20일)으로 한반도가 패권주의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가는 현실에서 국가 정보기관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그렇지만 현재 국정원은 예전 역량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는 우려가 크다. 정보 기능과 대공수사가 접목될 때 발휘되던 시너지 효과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간첩법 개정은 더는 미룰 문제가 아니다. 해외 입법 사례를 보면 간첩 행위를 ‘적국’과 ‘외국’으로 구분하지 않고, 국가기밀도 군사기밀이든 산업기술이든 강력히 대처한다. 차제에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을 복원하거나, 최소한 국정원을 필두로 경찰, 방첩사(司)라는 3축 수사 체제라도 제대로 구축할 필요가 있다. 나라가 어려울 때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확고한 안보 태세를 갖추지 못하면 국가도 없다. 정권은 유한하지만 국가는 영원하다.
채성준 서경대 군사학과 교수, 안보전략연구소장
<원문출처>
문화일보 https://n.news.naver.com/article/021/00026817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