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영재교육 20년
“수업시간 내내 질문하거나 탐구하는 학생이 단 한 명도 없었어요. 학생들에게 ‘너희 이걸 왜 배우고 있니?’라고 물으니 대다수에게 ‘부모님이 시켜서 듣는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이 아이들, 정말 노벨상을 탈 만한 영재인가요?” (서울 강남구 A 초등학교 교장)
“엄마가 시키니까 하긴 하는데 뭘 배우는지는 기억이 안 나요. 영재학급이라는 건 알지만 내가 영재는 아닌듯해요. 수학시험 80점 맞은 적도 있어요.”(서울 성동구 B초등학교 서모군)
자칫, 교장 선생님과 학생의 대화로 들릴 수도 있는 이 이야기는 우리나라 영재교육의 오늘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영재교육 20년. 영재교육 위기론이 퍼지고 있다. ‘재능이 뛰어난 사람을 국가가 앞서 발굴해 키우겠다’고 한 게 영재교육진흥법의 구호였다. 하지만 현실은 ‘앞서’가 아니라, ‘뒤로’ 가고 있다.
현장의 목소리부터 거세다. 한 입시 컨설턴트 강사인 박모씨는 “영재과학고 진학하면 의대도 못 가게 막는데, 굳이 갈 필요가 있겠나?”라며 “어차피 학원에서 더 배우면 된다. 영재교육에 목매던 시절은 다 지나갔다고 보면 된다”고 전했다. 영재교육이 결국 입시를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하기도 한다. 서울교대 영재원 수강생인 초등학교 3학년 윤모 학생은 “영재원에 다니는 학생들 대다수가 같은 학원 영재원준비반 출신”이라며 “고1 선행 학습까지 마쳤기 때문에 영재원에서 배우는 내용 자체는 다 아는 것”이라고 말했다.
2003년 1만9974명이었던 국내 영재교육 대상자는 2013년 12만1421명을 찍은 뒤 하락세다. 2019년 10만명 밑으로 떨어졌고 지난해는 7만9048명이었다. 영재교육 기관 수도 2003년 전국 400여 곳에서 2013년 3011곳으로 정점을 찍고 지난해에는 1704곳으로 줄었다. 정점 대비 56% 수준이다. 한국영재교육학회장을 지낸 이정규 서경대 교수는 “영재교육 대상자·담당교원·기관 수가 일제히 줄어들었다는 것은 학령인구 감소만을 탓할 순 없다”며 “정부의 무관심과 예산 급감, 영재교육 중요성의 인식 부족이 낳은 결과”라고 분석했다.
진보 교육감 지역은 지원 부족 더 심해
때문에, 영재교육 기관 인기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교육부에 따르면 2019년 4.8%였던 과학고·영재고 진학 희망률은 지난해 4.4%로 줄었다. 같은 기간 일반고 (자율형 공립고 포함) 진학 희망률은 67.5%에서 71.9%로 증가했다. 영재과학고 입학 경쟁률도 일제히 하락했다. 8개 과학영재고의 평균 경쟁률은 2019년 15:1에서 지난해 6:1까지 떨어졌다. 2019년과 2021년 사이 학령인구가 807만4000명에서 770만명대로 약 5% 줄었지만, 영재교육 기관 진학 경쟁률은 60%가량 낮아졌다. 2020년부터 영재학교·과학고 중복 지원이 금지됐다는 점을 고려해도 영재학교 경쟁률이 줄어들고 있음은 분명하다.
사교육 1번지인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서도 영재교육원이나 영재과학고 입학은 이미 ‘엘리트 코스’에서 탈락했다. 대치동에서 20년 가까이 영재학교 입시 지도를 해온 김모(69) 원장은 “영재학교 TOP 3(한국과학영재학교, 서울과학고, 세종과학예술영재학교)를 제외하고는 영재교육 받는 게 아무 의미가 없다”며 “영재학교에서 올림피아드에 나가봤자 자기소개서에도 적지 못하기 때문에 차라리 일반고에서 내신을 쌓고, 학원에서 보충수업을 듣는 게 대입에 더 유리하다”고 말했다. 윤초희 동국대 교육학과 교수는 “대학입시에서 영재교육 이수 경험이나 각종 대회의 수상실적을 활용하지 못한다는 점이 (영재교육 인기 하락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영재교육 인기가 시들해지는 사이 국제올림피아드는 톱클래스인 ‘서울과고’의 잔치가 됐다. 2017년부터 국제수학올림피아드 대표학생은 모두 서울과학고등학교가 독식했다. 같은 기간 생물은 37%, 화학은 50%, 물리는 88%가 서울과고생이었다. 시험을 통해 뽑는 올림피아드 참가자들이 수년째 한 학교에 집중된다는 건 다른 영재학교가 ‘개점휴업’ 상태라는 방증이다. 윤 교수는 “톱클래스 영재교육을 받는 학생들은 가정환경이 좋아 어렸을 때부터 사교육을 받았던 학생들이 대다수”라며 “특정 배경의 학생들이 영재교육에 쏠리는 건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원문출처>
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04141#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