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은 생각할수록 어처구니 없고 미안한 일이었다.
유년시절 초등학교 3, 4 학년 때 쯤으로 기억된다. 여름방학이라 이웃집에 부산에서 또래 친구가 와 있었는데, 얼굴이 하얗고 아는 것이 많았다. 그렇게 보였다. 다소 거들먹거리는 게 거슬렸지만 대도시의 신기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어 틈만 나면 그와 어울렸다. 영도다리가 하루 두 번씩 하늘 위로 열린다는 이야기, 한 학년이 우리 학교 전교생보다 많은 12반이라 수업을 오전 반과 오후 반으로 나누어 한다는 얘기 등 놀라운 얘기에 우리 시골 아이들은 귀를 쫑긋 세웠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터였다. 부산 용두산 공원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잠시 당황하며 계산을 해보았다. 이순신 장군이 언제적 사람인데,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막내 동생이라도 그렇지, ‘동상’이 여태 살아있다는 소리는 우리를 촌놈이라고 깔보는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거짓말 말라며 버럭 소리쳤다. 그는 틀림없다고, 아버지와 가서 직접 봤다며 목소리를 높혔다. 그 후로 다시는 그와 놀지 않았다. 동네 아이들에게도 설명해 주었다. 이순신 장군의 친 동생은 커녕 팔촌 동생이라도 그럴 수는 없다고, 임진왜란 발발 년대와 사람 나이를 계산해가며 얘기해 주었다. 내 말을 쉽게 알아들은 친구들도 하나 둘 그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그는 며칠 안되어 부산으로 되돌아 갔다.
그때까지 우리 마을에는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석유 등잔불 아래서 숙제를 하고 나면 콧구멍이 연기에 절어 새까매진 채로 나다니던 우리들은 동상이라는 것을 본 적도 알지도 못했다. ‘동상’이라는 말은 할머니와 엄마로부터 귀 아프게 들어 온 ‘동상을 잘 데리고 놀아라’, ‘동상과 사이좋게 지내라’는 말이 전부였다. ‘동상’은 오로지 동생을 의미했다. 지금까지도 어디선가 ‘무식한 놈이 용감하다’는 말이 들리면 부끄러워져 얼굴이 붉어진다.
살다보면 단어의 의미에 대한 해석과 작은 오해가 큰 갈등을 불러오는 경우가 많다. 대선을 앞두고 토해내고 있는 후보자들의 열띈 발언들을 듣고 있으면 새삼 어휘에 대한 바른 정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감한다.
유감이다, 사과한다, 같은 흔한 말이나, 법치, 개혁, 공정, 정의, 내로남불, 정권교체 등 무거운 단어들, 심지어 자유와 평등, 상식 같은 누구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말들까지 그것의 의미를 각각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고 발설함으로써 토론은 독백이 되고 정책 경쟁은 말싸움으로 전락하고 있다.
따라서 누군가 말을 하면 핵심 단어의 뜻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먼저다. 다음에 앞 뒤 맥락을 짚어보고, 때로는 그 말이 나온 상황까지 감안하여 전체를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고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나와 이야기하고 싶다면 먼저 너의 용어를 정의하라“고 깐죽댈 수는 없지 않은가. 계몽주의 사상가 볼테르의 말이다. 그는 적확한 어휘와 빛나는 재치로 18세기 타락한 권위와 광신을 맹폭하여 프랑스 대혁명의 아버지가 된 인물이다.
한때 뒷골목에는 불량배들이 설쳤는데, 지나가는 학생을 붙들고는 돈 좀 빌려달라며 손을 내밀곤 했다. 학생들은 꼼작없이 돈을 내주었는데, 이때 그 돈을 되돌려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 친구는 없었다. 불량배가 사용한 ‘빌려달라’는 말은 그냥 ‘달라!’는 의미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전 ‘존경하는 아무개님! 이라고 했더니 진짜 존경하는 줄 알더라’는 말이 회자됐었는데, 자신의 과거 언행과 최근의 현란한 논법을 제대로 감안하여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의 경솔함을 오히려 나무라서 많이들 머쓱해 했다.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는 말이 있다. 어느 프랑스 시인이 쓴 표현인데, 해 질 무렵 산등성이에서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는 실루엣이 나를 맞이하러 나온 개인지 해치려는 늑대인지 분별하기 어려운 시간을 일컫는 말이다. 어스름 속에 희끄므레하게 보이는 모양새로는 개인지 늑대인지 구별하기 힘들다. 우는 소리도 비슷하여 쉽지는 않으나, 세심하게 들으면 분별할 수 있다. 눈 앞에서 그의 태도나 동작을 볼 수 없다면 소리로 판별할 수 밖에 없다.
사람도 일차적으로 그가 하는 말(言語)로 그 됨됨이를 짐작한다. 말의 진실성은 행동으로 증명된다. 말은 쉽게 꾸밀 수가 있으나 행동은 거짓으로 꾸미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급할 때는 말과 행동의 일치여부만 잘 살펴보아도 구별의 실익이 있다.
요컨대 사람은 말을 할 때 어휘의 뜻을 정확히 해야 하며, 듣는 사람은 화자가 스스로 밝히지 않더라도 그의 과거 화법과 행적을 고려하여 새겨서 들어야 한다. 그래야 얼마 남지 않은 어스름 시간에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 저 실루엣의 정체가 개인지 늑대인지 제대로 판별할 수 있다. 사람의 됨됨이는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은 화려한 몇 마디 말로 가늠할 수 없다. 그리고 사람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 법이다.
<원문출처>
대한경제 https://www.dnews.co.kr/uhtml/view.jsp?idxno=20220119155833444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