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한 건더기 하나 건진 것 없이 또 한 해가 저물어 간다. 허전함인지 조바심인지 새벽같이 잠을 깬다. 창 밖 바람소리가 사납지 않다는 느낌에 점퍼 옷깃을 세우고 집을 나선다. 길섶과 언덕배기 마른 관목 가지 위에 하이얀 꽃이 피었다. 겨울의 순결한 정령, 서리가 앉은 것이다.
새삼스레 세상이 얼마나 깨끗하며 아름다운 곳인지를 깨닫는다. 들길로 들어서니, 논바닥 벼 그루터기와 이 고랑 저 고랑에 편하게 누운 이삭들, 논두렁 마른 풀잎 위에서 눈 부시게 빛나는 서리꽃이 계시처럼 눈을 찌른다. 평범한 삶의 흔적과 노작들 위에 내려 앉은 하늘의 점지. 인간이 얼마나 순결한 기운 속에서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맑은 지혜와 차가운 숨결, 한 치도 양보할 것 같지 않은 정직함의 고집이 고스란히 응결되어, 오지게 붙어있는 붉은 단풍 잎에 덧입혀 피어난 서리꽃이다. 봄날의 꽃보다 더 아름답다는 서리 앉은 그 단풍이다. 어느 추운 겨울날 상가집에 다녀 오시던 엄마의 순백한 옥양목 치마에서 풍겨오던 알싸한 내음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걸음마다 스며온다. 누군가를 영원히 떠나보내고 돌아오는 마음의 빈자리가 하이얀 치마폭에 고스란히 맴돌았다. 사람을 보내는 마음이 세월을 보내는 마음을 닮았다. 삶의 무게, 살아남은 자의 고독이 세모의 들길 위에서 호젓이 맞이한다.
한 해가 저무는 이즘에는 서리 앉은 새벽길을 걸어 볼 일이다. 칼날 같이 예리해진 이성이 두루뭉술 지내온 나날들의 곁가지를 사정없이 잘라나고 오로지 순정한 결기로 응고된 자신을 본다. 한 해 동안 쌓였던 게으름과 미움과 헛된 기대가 서릿발에 멈칫 물러나며 흐릿해진 정신에 깃대가 꽂힌다.
젖은 짚단 태우듯 보낸 한 해라 자책하는 것도 사치스럽다. 코로나에 지치고 증오로 칠갑된 사회에 주눅들어 숨 한번 크게 쉬지 못했다고 한 숨 쉴 일도 아니다. 아랑곳할 곳 없는 마음은 전봇대에 걸린 연처럼 분주히 펄럭거리기만 할 뿐 허공을 맴돌았지만, 연이 전봇대에 걸린 것이 운이 나빠 그리되었듯, 어느 바람이 순조로운 날 걸린 고리에서 벗어나 힘차게 비상할 날이 있음을 믿는다. 희망은 우연에 대한 신뢰에서 나온다.
그리고 우연은 아름답다. 로트레아몽의 싯귀처럼 ”수술대 위에서 우산과 재봉틀의 우연한 만남처럼 아름다운“ 것은 흔히 기막혀서 아름답다. 드물게 아주 드물게 찾아오기에 아름답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애써 음원을 찾아 듣는 것보다 우연히 라디오나 스피커에서 듣게 되었을 때 훨씬 더 반갑고 감동이 컸던 기억이 있다. 미리 약속하여 만날 때보다 시장통의 골목에서 우연히 만난 연인이 더 반갑지 아니하든가.
”엘리자가 말했어요. 세상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진 것 같아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난다는 거니까요.“ 어린 소녀 ’빨강머리 앤‘의 말은 아름다운 위로의 복음이다. 세상이 내 생각대로 다 된다면 얼마나 재미없고 지루하겠는가. 우리가 살아 갈 이유는 세상이 마음 먹은대로 되지 않았기에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고, 내일이나 그 언제든 생각지도 못한 굉장한 일이 일어 날 것이라는 희망 때문이 아닌가.
’인생은 초콜릿 박스와 같다. 어떤 것을 잡을지 모른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 나왔던 명대사다. 여러 가지 초콜릿이 담겨있는 상자에 손을 넣으면 어떤 것이 잡힐지 알 수 없다. 우리 인생도 그렇다. 늘 쓴 초콜릿만 얻어 걸리란 법은 없다. 때로는 살살 녹는 달콤한 것을 입에 넣고 환희에 들떠는 날도 있을 것이다. 바라기는 새해에는 아예 유리로 만든 투명한 초콜릿 박스를 받았으면 좋겠다. 초콜릿 색깔의 농담(濃淡)과 모양과 포장지를 요모조모 살펴보고 가장 그럴 듯한 것을 고르면 살패할 확률이 훨씬 줄어들 테니까 말이다. 그런다고 안심할 수야 없다. 초콜릿은 결국 입에 넣고 씹어 봐야 진가를 알 수 있으니까.
이윽고 첫 햇살이 들판에 보석처럼 쏟아진다. 순식간에 서리꽃은 지고 들판과 논두렁과 언덕엔 갈색 덤불과 누렇게 빛바랜 잔디가 민낯으로 얼굴을 내민다. 그들 빛이 지금 비록 잠시 초라하나 한때는 왕성했고 찬란했던 시절이 있었음을 기억할 것이라. 당장 내일 아침이면 하이얀 서리꽃이 다시 눈 부실 것이며, 눈이라도 내리면 은빛 별천지로 변신할 것이고, 얼마 안 있어 예쁜 봄꽃과 신록이 환희의 송가를 부를 것이다.
그러니 기다려 보자. 곧 도착할 투명한 초콜릿 박스를. 그리고 새해에는 아침마다 빨강머리 앤의 마음으로, 희망의 주문으로 눈을 뜨자. ”아침은 어떤 아침이든 즐겁죠.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생각하고 기대하는 상상의 여지가 충분히 있거든요“ 우연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이 희망이다. 빛나는 희망의 아침이다.
<원문출처>
대한경제 https://m.dnews.co.kr/m_home/view.jsp?idxno=2021122616192275907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