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세근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사무총장·서경대학교 광고홍보콘텐츠학과 겸임교수
2021년의 색깔은 검정이다. 개인적인 소회다. 코로나 탓이다. 세상이 죽음과 신음으로 덮였다.
기독교는 코로나와 죄(罪)가 닮은꼴이라고 설명한다. 첫째, 둘 다 인간이 만들었다. ‘중국 실험실 유출’ 같은, 아직 확인되지 않은 ‘설(說)’은 그만두고라도 코로나는 인간이 자연을 착취한 대가라는 학설이 대세다. 죄 역시 인간의 제조물이다.
둘째, 분리다. 죄가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을 분리시키듯 코로나 역시 사람과 사람을 분리시켰다. 우리는 요즘도 하루하루를 분리 속에 보낸다.
셋째, 둘 모두 대가는 죽음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은 기독교의 유명한 경구(警句)다. 코로나 역시 수많은 죽음을 몰고 왔다. 지금까지 전 세계 누적 코로나 사망자는 150만 명을 훌쩍 넘겼다.
코로나 때문만도 아니다. 올해 대한민국은 유난히 암울했다. 서너 배씩 뛴 부동산 가격이 그렇고, 10% 이상 급등한 물가가 그렇고, 표류 중인 남북 관계가 그렇고, 이리저리 찢긴 사회와 정치가 그렇다.
해법은 누구도 모른다. 저마다의 주장만 어지럽다. 대선 후보들의 공약 역시 서로 비슷해 미지근한 느낌만 준다.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바꾼 탓에 무엇이 원안이고 무엇이 수정안인지, 공약을 밝힌 본인조차 헷갈리지 않을까 싶다.
최근 박세리 선수의 슬럼프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느 해, 우승 후 갑자기 슬럼프가 왔다고 했다. 무슨 짓을 해도 탈출할 수 없는 늪, 이게 바로 슬럼프의 본질이란다. 슬럼프를 만난 대다수 선수들이 은퇴를 선택하는 이유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지내던 어느 날, 지인이 낚시를 권했고, 낚시를 통해 그는 슬럼프를 기적적으로 통과했다고 한다. 물의 어떤 덕목이 그를 회복시켰을까.
“‘큰물을 만나면 관찰하라(見大水必觀)’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자공(子貢)이 공자(孔子)에게 물었다
스승의 답은 소상했다.
“물은 만물을 키우지만 얼핏 보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듯 보인다. 이게 덕(德)이다. 낮은 곳으로 흐르지만 순리와 법칙을 따른다. 이건 의(義)다. 쉼 없이 흐르지만 마름(盡)이 없다. 이게 도(道)다. 막힌 곳을 뚫어 길을 내고, 절벽을 만나도 두려움이 없으니 용(勇)이다. 그릇에 담아도 기울지 않으니 법(法)이요, 공간을 채워 한 점 빈 곳도 남기지 않으니 정(正)이다. 연약하지만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니 찰(察)이요, 물질을 씻어 정갈하고 아름답게 만드니 화(化)다. 만 번을 굽어도 결국은 동쪽으로 흐르니(萬折也必東) 지(志)다. 이것이 군자가 물을 관찰해야 하는 아홉 가지 이유다”
유명한 구덕론(九德論)이다. 순자(荀子) 유좌(宥坐)편에 보인다.
구덕론에서 ‘만절필동(萬折必東)’이란 성어가 나왔다. 강이 만 번을 굽이쳐도 결국 동쪽으로 흐르듯, 세상이 제아무리 요동쳐도 결국은 도리로, 옳음으로 귀착된다는 얘기다.
유권자에게 이번 선거만큼 곤혹스런 선거가 또 있었나 싶다. 한쪽이 대장동을 들고나오면, 상대는 고발 사주를 얘기한다. 한쪽이 아내 리스크를 꺼내면, 다른 한쪽은 자식 문제를 꺼내 든다.
그렇다고 동전 던지기로 선택할 순 없는 일이다. 선거가 2개월 남짓 남았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후보들이 주장을 꼼꼼하게 읽어보고, 공약을 관심 있게 검토하자. 만절필동은 ‘동’이라는 희망도 주지만 ‘절’이라는 좌절도 암시한다. ‘절’을 줄이는 일, 이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새해엔 만절필동의 완성을 보고 싶다.
<원문출처>
경북일보 http://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902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