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반대말이란 개념에 흔히 속는다. 전쟁의 반대말은 평화인가? 아니다. 일상(日常)이다. 남자의 반대말은 여자인가? 물론 아니다. 전쟁과 평화, 남자와 여자 모두 마주 보고 있는 개념일 뿐, 반대말은 아니다.
그럼 승리의 반대말은 뭘까? ‘이기지 않음 혹은 못함(不勝)’이다. 이기지 않거나 못한 게 패배는 아니다. 비겼거나 차원이 다른 ‘이김’을 챙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패배는 뭔가? 이기지 못했을 뿐 아니라, 전리품도 없는 경우다. ‘빈손 되고 옷까지 털린’ 경우다. 패배란 이기지 못한 상태에서 더 나아간, 최악의 경우다. 그리고 패배를 선택하는 것은 ‘이기지 못한 자’, 자신이다.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성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복이 되고, 말씀을 떠나면 저주를 받게 된다는 말이다. 복과 저주를 정하는 주체가 사람 자신이라는 뜻이다.
선진(先秦)시대 좌구명(左丘明)이 쓴 좌전(左傳) 『양공(襄公) 23년』에 ‘화복무분, 유인소소(禍福無門, 唯人所召)’라는 구절이 보인다. ‘화가 들어오는 문도, 복이 들어오는 문도 없으며, 오직 사람 스스로가 화복을 부른다’는 말이다.
『역경(易經)』에도 같은 얘기가 나온다. ‘길흉회린(吉凶悔吝)의 도’다. “일을 도모할 때 그것이 길(吉)한가, 흉(凶)한가, 혹은 뉘우침(悔)으로 흉함에 이르지 않을 것인가, 길할 수 있는데 상황을 잘못 판단해 흉으로 갈 것인가(吝) 등 ‘길흉화린’의 네 가지 경우를 잘 따져서 판단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길과 흉은 판단에 따라 갈린다. 후회할 것을 후회하면 흉을 막고 길을 불러들이고, 고집을 부려 판단을 그르치면 길을 피하고 흉을 청하니 말이다.
민주당 경선 결과를 놓고 경선 직후부터 나흘 내내 시끄러웠다. 이낙연 후보 측은 “과반 득표를 인정할 수 없으니 결선 투표를 치르자”고 주장했다. 대선 후보로 결정된 이재명 후보를 향해 “구속될 것”이란 막말까지 나왔다. 어차피 구속될 후보이니 결선 투표를 통해 새 후보를 정하자는 얘기다. 이게 말이 되는가?
규정 얘기도 그렇다. 민주당 특별당규 59조 1항은 ‘후보자가 사퇴하는 때에는 해당 후보자에 대한 투표는 무효로 처리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헌데 60조 1항은 ‘경선투표에서 공표된 개표 결과를 단순 합산해 유효투표의 과반을 득표한 후보자를 당선인으로 결정한다’고 규정한다. 이낙연 후보 측은 60조 1항의 ‘공표된 개표 결과’라는 구절을 근거로 “사퇴한 후보에게 투표한 것만 무효이고 사퇴 이전에 얻은 ‘공개된 개표 결과’는 유효하다”고 주장했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사퇴한 후보에게 누가 투표하나? 헌데 왜 ‘사퇴 전 투표’와 ‘사퇴 후 투표’를 구별해야 하는가? 이건 두 규정 사이의 미묘한 충돌 지점을 찾아내 몽니를 부리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들 주장대로라면 이 규정에 따라 치러진 과거 선거들의 결과는 또 어떻게 처리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낙연 후보 측이 13일 오후 경선결과 승복을 선언한 것은 늦었지만 다행스런 일이다. 끝까지 몽니를 부렸다면 회(悔) 아닌 인(吝)의 결과를 맞았을 것이다. 이 후보 측도 이 점을 간파하고 걸음을 멈췄겠지만.
승복하지 않는 자는 ‘이기지 못한 자’가 아니라 ‘패배한 자’가 된다. 안타깝게도 이낙연 후보는 ‘패배한 자’에 매우 가까운 ‘이기지 못한 자’가 되고 말았다. 정치인들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일이다.
<원문출처>
경북일보 http://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85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