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맑은 바람이 분다. 회색빛 먼지를 밀어 내고 솜털 같은 구름 한자락 동무 삼아, 몸 가벼웁게 바람이 분다. 뜨거운 햇볕을 견뎌내며 타 들어간 속내는 아직도 열기가 남아 있는데, 때가 되니 바람이 분다.
바람이 거니는 물가, 흔들리는 억새꽃이 빈약한 아내의 흰 머리카락인 양 서러운데 철 없는 사내는 울긋불긋 등산복에 ’으악새‘를 노래한다. 가늘어진 햇살이 솔잎으로 빗어내린 바람은 소녀의 단발머리처럼 정갈하게 찰랑인다. 산들선들 다가선 바람에 옹색했던 마음이 열린다.
어디서 오는 바람인지 궁금하고 어떤 사연이 있는지도 알고 싶다. 신비주의자인 바람에게 확실한 것은 똑 같은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닿는 곳마다 다르며 때마다 변한다. 그는 마냥 믿을 수는 없으나 어쩔 수 없이 끌리는 ’나쁜 남자‘를 닮았다. 염소 새끼 뛰노니는 듯 예측이 안되며 가을날 고추잠자리처럼 종잡을 수 없다. 변덕스럽고 때로는 쉽게 몸을 맡기지만 태풍처럼 아주 화가 많이 난 경우를 제외하면 가까이 할 만하다. 가까이 할 만한 정도가 아니라 의뭉스럽고 매력적이기도 하다. 누구는 민심이 그렇다고 한다.
구름은 바람과 더불어 흐르고, 단풍은 바람에 실리어 낭만을 즐긴다. 바람의 장단에 맞추어 물결은 춤추며, 풀잎은 바람 따라 눕고 바람 따라 일어 난다. ’바람 부는 대로, 물 흐르듯이‘, 슬몃 떨어져 내리는 낙엽처럼 홀연히 떨치고 나선 걸음, 이것을 풍류(風流)라 한다.
풍류는 선비의 덕목이다. 풍류를 모르는 사람은 선비 축에 끼지 못했다. 시화(詩畫)를 기본으로 삼고 가무를 즐겼으며, 언행은 신중하되 거침이 없고, 온화함과 은근함이 소탈한 생활 속에 녹아 있었다. 거지 꼴의 이몽룡과 김삿갓이 그랬듯 밥 한 술, 술 한 잔 얻어 먹을 때도 시 한 수쯤은 지어 건네며 받았고, 이방원과 정몽주의 고사처럼, 죽이기로 작정한 정적에게도 술 한잔 대접하며, 간절한 의중을 시 한 수에 담아 설득할 줄 알았다. 올곧고 순수한 정신, 절제 가운데 낭만 가득한 여유, 무엇보다 걸림이 없는 표표함이 풍류의 진면목이다.
풍류를 아는 이는 만남의 약속조차 예사롭지 않다. 다산 정약용은 마음 맞는 벗들과 죽란시사(竹欄詩社)라는 모임을 만들었는데, 모임 날짜를 정한 규약이 이러하다. “새해 첫 모임은 살구꽃이 필 때로 하고, 다음 모임은 복사꽃이 필 때와 한여름에 참외가 익으면 갖기로 하며, 초가을 서늘할 때 서쪽 연못에서 연꽃 구경을 위해, 그리고 국화가 피면 한 번 모이고, 겨울철 큰 눈이 내리면 다시 만나며, 세모에 화분의 매화가 피면 모인다.” 세상에 이보다 더 로맨틱한 만남이 또 있을까? 낭만과 아취를 나눔이 풍류의 진수임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여럿이서 어울려야만 재미가 아니다. 주위에 보는 이 없이 혼자일 때 선비다움이 빛을 발하듯, 풍류도 홀로임을 기꺼이 즐길 줄 아는 데서 깊은 맛이 살아난다. 그저 자신의 뜻에 맞아 흡족하면 그만이다.
“홀로 거문고를 타고/ 홀로 잔을 들어 마시네/ 거문고 소리 이미 내 귀를 거스르지 않고/ 술 또한 내 입술 거스르지 않으니/ 어찌 꼭 지음(知音)을 기다릴 거며/ 함께 마실 술벗 또한 기다릴 것 없노라/ 내 뜻에 맞으면 즐겁다는 말(適意則爲歡)/ 이 말을 나는 가지려 하네(此言吾必取)” 고려의 대학자 이규보의 <적의(適意)>는 가히 풍류에 대한 절창이라 할 만하다. ’내 뜻에 맞는 것‘이 중요하며 선비가 취할 심경(心境)이라는 말이다. 내 ’뜻‘은 비와 이슬로 가꾼 마음밭의 알곡이며 꾸밈 없는 진정이다.
내 ’뜻‘은 내 발과 같다. 내 뜻에 맞지 않는 일은 내 발에 맞지 않는 신발처럼 불편하고 고통스럽다. 값비싼 신발이라고 자신의 발에 맞지도 않는 것을 무리하게 신으면 십리도 못가서 발병이 난다. 내면의 뜻을 거스른 허세와 과욕의 슬픈 자화상이다.
자신의 뜻과 맞지 않은 일에는 으레 수상한 장난이 끼어 든다. 치밀하나 음흉한 수작이 주위를 어지럽히고 거짓과 불신으로 오염시킨다. 맑고 푸른 하늘을 흐려 놓는다. 이런 수상한 장난은 일찍이 보아 왔듯이 오래 가지 못한다. 회오리 바람처럼 곧 지나간다. 다만, 이렇게 혼탁해진 하늘엔 한 바탕 큰 바람이 필요하다. 바람이 불어 오는 곳, 그곳에는 무심한 듯 무서운 생명의 기운이 있다. 어린아이의 첫 숨결, 청춘의 정의로운 열정, 시민들의 깨어있는 의식 같은 것. 큰 바람이 이 기운을 빌어 도처에 괴어 있는 탁한 찌꺼기를 말끔히 쓸어낼지라.
바람이 분다. 맑고 시원한 바람이 분다. 눈을 감고 느껴 보라. 가슴을 열고 안아 보라. 회복과 재생의 숨결이다. 햇살을 가늠하고 이슬을 부르며 공기를 바꾸어 새로운 기운을 불러 온다. 바람이 불어 오는 곳, 맑은 기운이 움터는 곳, 그 곳으로 가자.
<원문출처>
e대한경제 https://www.dnews.co.kr/uhtml/view.jsp?idxno=2021092917035917507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