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세근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사무총장·서경대학교 광고홍보콘텐츠학과 겸임교수
대선 무대가 달아올랐다. 여야 막론하고 다수의 후보가 나섰다. 날선 공방이 벌써부터 치열하다. ‘후보 난립(亂立)’이라고 비판하는 시각도 있지만 난 그렇게 보지 않는다. 과거, 정당에 ‘주인’이 있던 시절에는 그 ‘주인’이 당연직 후보가 되거나 혹은 그가 지명하는 인물이 후보가 됐지만 지금은 다르다. 누구나 자천, 타천으로 후보가 될 수 있다. 얼마나 건강한가.
후보가 여럿이면 좋은 점이 적지 않다. 우선 당내 민주화가 튼실해진다. 1인 독주는 생각할 수 없게 된다. 경쟁을 통해 양질의 정책도 생산된다. 뿐인가. 유권자들의 인물 고르는 안목 역시 절로 좋아진다.
현재 대선 주자들의 다툼을 보면 춘추전국시대(기원 전 770~221)의 백가쟁명(百家爭鳴)이 연상된다. 당시는 사상과 문화가 가장 역동적으로 분출했던 시기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는 “189개 학파가 등장했고, 4324편의 저작을 쏟아냈다”고 전한다.
춘추전국시대가 성공한 이유는 다섯 가지다.
첫째, 정치적 변혁이다. 제후들이 천하 제패를 위해 인재를 두루 모으고, 각자의 학설과 사상을 동원해 부국강병에 나섰다.
둘째, 경제적 풍성이다. 부유한 유한(有閑) 계층이 늘어났고, 이들이 대거 학술 활동에 참여해 각 제후에게 정치 철학을 제공했다.
셋째, 과학기술의 발달이다. 천문, 수학, 광학, 음성학, 역학, 의학 등이 급격히 발달했고, 그 결과 백성들의 인식 수준이 높아졌다.
넷째, 문화 융성이다. 정부가 틀어쥐고 있던 학문이 민간으로 이양되면서 민간 교육이 융성했다.
다섯째, 학술자유다. 학문이 정부로부터 분리돼 각 사회 세력 및 이익 단체가 자유롭게 학문을 탐구했다. 각 정치 세력에 맞는 학문적 토대를 제공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지금의 우리 상황 역시 흡사하다. 정부가 독점하던 역사 인식이 민간에 의해 다양하게 해석된 지는 이미 오래다. 코로나임에도 경제적 도약은 오히려 촉진됐고, 문화적 다양성은 어느 선진국에도 뒤지지 않는다.
춘추 융성의 핵심 요인 하나만 꼽으라면 중국 역사학자들은 주저 없이 ‘사(士·선비)’를 꼽는다. 지식인이면서 전략가인 선비가 있었기 때문에 제후들이 경쟁할 수 있었고, 결국 오랜 염원인 천하 통일이 가능했다는 얘기다.
춘추시대 이전에 중국에는 선비가 없었다. 학교는 모두 관립이었다. 중국의 모든 예법을 주관했던 『주례(周禮)』는 “예로부터 배움은 관부(官府)에 있다”고 규정한다. 모든 학문의 스승 역시 관리였다. 정부가 완벽하게 학교와 법률을 장악했다. 주(周)의 천도 이후 천자의 권위가 쇠퇴하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사학이 발흥했고, 누구나 ‘말린 고기 한 상자’의 학비만 내면 공부할 수 있었다. 이때 선비 계층이 비로소 등장한다.
선비는 새 질서의 창조자이면서 심판자였다. 나라를 세우기도 했지만, 부실한 나라는 가차 없이 허물기도 했다.
오늘 대한민국의 선비는 누구인가? 사회를 주시하고, 정치에 관심을 놓지 않는 모든 이들 아닌가? 이들은 ‘매의 눈’을 지녔고, 가슴엔 공동체에 대한 열망이 있다. 정파나 지역, 사상적 편향성에 둔감하고 공정과 도덕, 그리고 실용에 가치를 둔다. 한국형 선비에게 선동이나, 과장, 그리고 근거 없는 폄훼가 통할 수 없는 이유다. 그러니 공복(公僕) 의식 없이 대통령에 나서 봐야 헛수고다.
대선 후보들에게 고한다.
선비들의 매눈을 감당할 수 있는 자,
국민 앞에 서라!
<원문출처>
경북일보 https://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79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