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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욱 서경대 특임 교수


625. 드디어 서울을 벗어났다. 혼잡하고 어지러운 서울의 우울한 하늘을 뒤로 하고, 푸르름과 생명이 짓는 소리와 맑은 기운이 가득한 강촌으로 뜀박질하듯 들어왔다. 비 소식이 걱정되었으나 다행히 더위를 씻어 줄 정도의 실비가 잠시 들러 주었을 뿐, 큰 어려움은 없었다. 40분 정도만 벗어나도 이렇게 쾌적하고 운치있는 풍광이 딴 세상처럼 전개되는데, 그동안 참으로 탁하고 복잡한 서울 복판에 눌러앉아 미련스레 살아 왔구나. 참으로 오랜만에 내 것처럼 느껴보는 전원이다. 학업에 이은 직장 생활과 아이들 교육을 위해 도시로 들어 온 이후, 늘 꿈꿔 오던 시골로 이제야 돌아온 것이다.

 

필자의 거주 이전과 주택 구입 편력(遍歷)5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학교에서 집으로 오자마자 샘물 한 바가지에 식은 밥을 말아서 후루룩 몇 숫갈 들이붓고는, 소 몰고 산으로 오르곤 하던 진주 인근의 산골 마을. 배움의 꿈을 좇아 부산으로 간 것이 그 시작이었다.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정복을 위해 고향을 떠날 때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낯선 곳을 헤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것처럼, 나 역시 일말의 불안과 한 줌의 희망을 그릴지언정 그토록 긴 기간을 객지로 떠돌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양자 간에 귀향의 갈망 외에는 닮은 점이 너무 없지만.

 

나의 도시생활은 중학생 때 형님과 함께 부산 문현동 언덕배기 판잣집 단칸방에서 출발했다. 촌놈이 그려오던 높은 빌딩과 번쩍이는 네온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세 가구가 부엌을 공유했고 걸핏하면 문 틈으로 새어 들어온 연탄가스에 취해 비틀거리며 엉금엉금 기어 나와야 했다. 그래도 우리는 잘 지냈다. 모두들 그렇게, 비슷비슷하게 지냈으니까. 이후 조금씩 넓은 집으로 옮기고 월세가 전세로 바뀌었다.

 

회사에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성실히(?) 일하면서 열심히 저축을 하던 중, 30대 중반에 직장 주택조합에 참여해 처음으로 서울 변두리에 아담한 아파트를 갖게 되었다. 40대 초반에는 89기로 인기 좋은 신도시 아파트에 당첨되는 경사도 맞는다. 몇 년 후 아이들 교육과 통근 편의를 위해, 그 아파트를 팔아서 서울 강남에 빌라 하나를 구입한다. 강남 아파트는 비싸서 언감생심, 그 빌라가 나의 부동산 투자 이력에서 최고 정점인 셈이다.

 

그리고 이제 20여 년의 서울 생활을 접고, 늘 그려오던, 뒤에는 산이 있고 앞으로는 강물이 보이는 교외로 이사를 왔다. 살아 계셨으면 엄마와 누나와 손 잡고 강변을 거닐며 소월의 노래를 흥얼거리고 싶어지는 그런 강촌으로. 마침 정부가 21번째인가 부동산 대책을 내놓은 마당에, 서울 살던 한 가족이 빠져 나왔으니 말썽 많은 강남 집값 안정에 보탬도 될 것이다. 비슷한 생각으로 도시를 떠나는 이들이 더 보태진다면.

 

실로 바다와 선단(船團)이 등장하지 않고 허리에 칼만 차지 않았을 뿐, 오디세우스와 크게 다르지 않을, 희망과 염려가 교차되며 좌고우면으로 힘겹게 분투해 온, 긴 주거 이전의 편력(遍歷)이었다. 흐린 달빛 속의 산책 같은 그 과정은 신산한 내 삶의 여정이자 정부 정책의 그림자였다.

 

그때도 주택문제는 온 국민과 정부가 머리를 싸매고 해결해야 하는 엄청 벅찬 과제였다. 날이 새면 공장이 지어지고 달이 바뀌면 도로가 닦여졌으며 인구까지 증가하여 주택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시절이었으니 더욱 심각했다. 그러나 해법은 간단하고 명쾌했다.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집을 많이 짓는 것이었다. 주택 200만호 건설계획과 택지개발촉진법으로 대표되는 주택공급 확대 정책으로, 오래된 초가집에 잊을 만하면 기어나오는 지네처럼 징그러운 그놈을 의미있게 손봐 주었다. 게다가 나처럼 아이 교육이 끝나고 직장에서 은퇴할 나이가 되어 근교나 시골로 물러나 주는 이들이 늘어나 준다면 효과는 상당할 것이다.

 

창 밖 언덕에서 서너 그루의 곧게 뻗은 상수리나무와 구불구불 자란 두 그루의 소나무가 비스듬히 서로 기댄 채, 이 좋은 곳을 몰라보고 먼 길 돌아 왔냐며, 잘 왔다며 손을 흔들고 있다. 산들바람 한 자락 불어 오니 영락없는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이다. 요크셔 지방의 황량함 대신 고향 언덕의 정겨움이 얹혀 있는 것이 다를 뿐. “저 보잘 것 없는 남자가 온 힘을 다 기울여서 80년 동안 사랑한다 한들 나의 하루치 분량만큼도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히스클리프의 연인 캐서린에 대한 사랑의 언어다. 그래, 지난 50년 동안 살아 온 도시의 날들보다 몇 배나 더 농밀하고 아름다운 삶이 여기서 시작된다. 히스클리프의 번개와 불꽃의 삶은 아니어도 달빛과 서리의 서정 속에 남은 인생을 채워 갈 것이다. 연둣빛 짙은 언덕에, 바람 타는 아름진 나무 사이로 강물을 보며, 그대를 생각하면서.

 

<원문 출처>

건설경제신문 http://www.cnews.co.kr/uhtml/read.jsp?idxno=20200709171758494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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