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대학교 권재욱 특임교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붉은색, 장미꽃의 화사함은 꽃자루에 붙어 있는 가시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황량한 사막은 그 어디메쯤에 신선한 물과 야자수와 과일을 품고 있는 오아시스가 빛나도 그냥 사막일 뿐이다.
태풍이 불면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하지만 태풍은 적도 지방의 열기를 완화시키고 지역별 강우량을 조절하며, 바닷속 퇴적물을 휘저어 플랑크톤을 끌어올려 분해시킴으로써 바다 생태계를 활성화시키기도 한다. 그렇다고 우리는 태풍에게 참 고맙다고, 자주 찾아와 달라고 하지 않는다.
우리가 잊고 있는 것 중에 세계 경제를 오늘날의 발전에까지 이르게 한 숨은 공로자가 있다. 기업과 자본주의의 성숙에 기여한 일등공신의 하나, 바로 복식 부기이다. 기술이 발달하고 회사 규모가 커지면서 복잡하고 다양한 활동과 성과를 어떻게 정리하고 인식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간 어려운 숙제가 아니었다. 단순히 수입에서 지출을 뺀 잔액으로 살피던 금전출납장식 단식 부기로는 날로 증대하는 거래와 얽히고 설킨 경영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잘한 것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잘못이 있었는가? 향후 어느 부문은 피하고, 어느 방향으로 나아 갈 것인가? 이 문제를 쉽게 해결하게 해 준 것이 복식 부기이다.
복식 부기는 차변과 대변으로 구분하여 차변에는 재산 항목을, 대변에는 자산과 부채 항목을 기록하되 수익과 손실을, 업적과 과실을 서로 상쇄하거나 퉁쳐서 차감하면 안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경영활동과 재정상황을 있는 그대로 상세히 들여다볼 수 있음은 물론 일정 기간을 단위로 자기 검증이 가능하게 됐다.
장미와 사막을 볼 때처럼, 태풍을 생각할 때처럼 기업의 경영활동에 대해서도 잘한 것과 잘못한 것을 분별해 기록, 각각 사실 그대로 인식함으로써 오늘의 번영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자본주의의 발전 원인에 대해 깊이 연구한 경제학자 베르너 좀바르트도 “복식 부기가 경영학과 경제학에서 가지는 중요성은 코페르니쿠스가 천문학에서 가지는 중요성에 견줄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왜 유독 사람에 대해서는 장점과 단점을, 공(功)과 과(過)를 뭉뚱그려서 좋은 사람 아니면 나쁜 사람으로 결단 내는 것을 예사로 할까? 참으로 오묘하고 변덕스러우며 파고 또 파도 깊이를 알 수 없는 존재가 사람이 아닌가. 누구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선하다 했고 누구는 악하다 했다. 지구의 생명붙이 중에서 오로지 선한 존재는 없으며 전적으로 악하기만 한 생명도 보지 못했다. 사람은 더욱 그렇다. 애국자가 매국노가 되기도 하며, 방탕에 침몰하던 이가 만인이 우러러보는 위인이 된 예도 흔하다.
어느 철인은 자연이 그러하듯 인간도 원래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며, 그저 자신과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누구는 선하다 하고, 또 누구는 악하다고 한다고 했다. 그가 행한 일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면 그로부터 무슨 이익을 얻었는가 살펴볼 일이다. 그가 저지른 일보다 혹독하게 비난하고 있는 자신이 보이면 그가 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일은 없었는지 돌아볼 일이다. 살펴보고 돌아 보아도 별 일이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십중팔구는 그를 단식 부기 방식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업적으로 지금의 과오를 덮어버리거나, 과거의 잘못으로 지금의 선행을 감해버린 것은 아닌지 확인해 볼 일이다.
사람을 바로 보기 위해서도 복식 부기가 필요하다. 그가 잘한 일은 잘한 일대로 샅샅이 기록하여 상을 주고, 잘못한 일은 또 그대로 낱낱이 밝혀 내어 벌을 주어야 한다. 잘한 일은 널리 알려 본받게 하고, 나쁜 일은 엄히 다스려 다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한다. 세종대왕은 지금의 능력과 인품을 보고 자신의 세자책봉에 반대하다 유배까지 갔던 황희를 기용했고, 제갈공명은 가정(街亭) 전투에서 군령을 어겨 패한 마속을 그간의 전공을 봐서 참형만은 면하게 해 달라는 여러 참모들의 간언에도 불구하고 눈물을 흘리며 목을 벴다.
우리 헌법도 과거의 공적으로 이후의 과실을 함부로 상쇄시키지 말 것을 선언하고 있다. 헌법 제11조 3항은 ‘훈장 등의 영전은 이를 받은 자에게만 효력이 있고, 어떠한 특권도 이에 따르지 아니 한다’고 명시, 국가 유공자에게 수여하는 훈장과 포장조차 과거의 업적에 대한 칭찬이자 명예일 뿐, 그 외 특별한 신분이나 자격 또는 권리도 인정되지 않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기업과 자본주의가 복식 부기 덕에 발전했듯이 우리도 사람을 평가할 때 복식 부기 식으로,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평가하면 훨씬 더 공정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석양이 비끼는 산길에 유월의 장미가 현란하다. 꽃의 유혹에 손을 내밀다 가시에 찔리고 만다. 아프다. 장미는 여전히 아름다우나 가시에 찔린 손이 더욱 아려온다.
권재욱(서경대 특임교수)
<원문 출처>
건설경제 http://www.cnews.co.kr/uhtml/read.jsp?idxno=202006031734464930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