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의 위세가 한풀 꺾였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종료됐지만 지난 6일부터 생활 속 거리두기는 계속 유지하기로 했다. 아직은 안심할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도 사회적 거리두기(保持一定的社會距離) 캠페인이 한창이다.
거리두기에는 부작용이 있다. 疏外(혹은 疎外)다. 疏外는 외로움을 넘어, 따돌리고 냉대하는 행위까지 포함한다. 인간에 의한, 인간에 대한 ‘인간 疏外’는 東西(동서)와 古今(고금)을 가리지 않는다.
『三國志(삼국지) 蜀志(촉지) 劉永傳(유영전)』은 “劉永이 모함을 당해 황제가 그를 疏外시켰다. 그 탓에 그는 10년간 황제를 알현하지 못했다”고 소개한다. 宋(송)대 정치가이자 사학자인 司馬光(사마광)도 "文帝(문제)는 秘書(비서)를 中書(중서)로 개명하고 인사권과 감찰권을 주었다. 尙書(상서)는 廢(폐)하지 않았으나 中書만 가까이 했기 때문에 尙書는 자연 疏外당했다”고 전했다.
유대인은 세상 사람을 ‘유대인과 개들’로 나눴다. 문화적 수준이 높았던 헬라인은 세상을 ‘헬라 영토와 야만인의 땅’으로 쪼갰다.
칼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만든 생산물이 자본가에 귀속되는 탓에(생산물로부터의 疏外) 노동자는 자기 뜻과 계획이 아닌, 자본가의 지시에 따라 노동한다(노동으로부터의 疏外)고 말했다. 그 결과 노동은 노동자에게 자아실현의 수단이 아니라 지루함과 고역의 원천이 됐다는 것이다(『현대철학 아는 척하기』, 이병창).
기독교는 인간이 죄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疏外됐고, 그 결과 불행해졌다고 본다. 저명한 설교가인 영국의 찰스 스펄전 목사는 疏外의 이유를 ▶거대한 무지의 구름 ▶험준한 죄악의 산맥 ▶거룩한 진노의 협곡 ▶광대한 두려움의 바다로 풀었다.
이번 총선에서 한층 분명해진 영남의 야당 몰표와 호남의 여당 몰표도 동서 간 거리두기의 다름 아니다. 거리두기는 안전을 위해서만 존재해야 한다. 마음의 거리두기는 疏外를 낳고, 疏外는 결국 증오와 폭력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희망은 있다. 코로나 사태에서 빛을 발한 대구와 광주의 ‘달빛동맹’이 그 증거다. 이제 한 걸음만 더 나아가자. 달빛동맹이 ‘햇빛동맹’이 되어 남과 북을 묶는 날, 疏外는 사라지고, 대신 행복과 富饒(부요)가 그 자리를 채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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