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회 취임 초기부터 ‘개혁성’ 강한 인사 및 정책 단행, ‘낙하산 논란’ 조기 해소
‘탈권위 리더십’으로 마사회 젊은 직원들과 ‘소통 능력’ 발휘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리더’인 김 회장, 일반 국민 눈높이 맞춘 마사회 개혁 적임자 평가
서민의 정서 꿰뚫어야 정치판 조직 전문가로 성공가능, 김 회장 경력이 갖는 ‘긍정 변수’
▲ 김낙순 한국마사회장 [일러스트=민정진/ⓒ뉴스투데이]
‘승마’는 고급 레포츠로 인식되고 있지만 ‘경마’는 도박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편이다.
이는 한국마사회 입장에서 불편한 대목이다. 일반 국민들은 한국마사회를 떠올릴 때 경마장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마사회는 승마와 경마 등 모든 말 산업을 이끄는 공기업이다. 더욱이 경마도 적절하게 즐기면 효과적으로 스트레스를 풀 수도 있는 레저산업이다.
마사회의 한 관계자는 지난 9일 기자와 만나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야 하는 바둑 기사들이 경마로 스트레스를 푸는 경우가 많다”면서 “유명 기사들중에서는 마주가 되서 본격적으로 경마를 즐기려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복잡성과 과도한 경쟁을 견뎌내야 하는 현대인에게 경마는 건전한 레저로 자리잡을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설명이다.
마사회를 책임졌던 역대 회장들은 국민의 잠재의식에 자리잡은 ‘부정적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힘썼지만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레저문화 선도’ 등의 기치도 내걸었지만 공감을 얻어내지는 못했다.
올해 초 취임한 김낙순 마사회장은 더 불리한 여건이었다. ‘전문성 결여’라는 지적과 함께 전형적인 ‘낙하산 인사’라는 비난이 동시에 제기됐다. 그럼에도 김 회장은 수수하고 소탈한 스타일이지만 상당한 돌파력을 보여줬다.
취임초부터 ‘개혁성’이 돋보이는 인사 및 각종 정책을 단행해 언론의 긍정적인 평가를 얻어내고 있다. 마사회 조직 뿐만 아니라 김 회장 본인에 대한 인식개선 효과가 감지되는 분위기다.
김 회장은 지난 4월에는 사적 관계를 철저히 배제하면서 능력 중심, 공정성에 부합하는 인사를 단행했다. 효율성을 강조한 조직 개편도 동시에 추진했다. 무엇보다도 마사회 구성원들이 ‘변화’를 체감하고 반응도 좋은 편이다.
‘탈권위적 리더십’도 김 회장이 직원들 마음을 얻는 데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마사회의 또 다른 관계자는 “김 회장은 가끔 오후 6시 넘어서 불시에 사무실을 돌아보고 남은 직원이 있으면 ‘빨리 집에 가라’고 독촉하거나, 평소에도 직원들과 격의 없는 농담을 주고 받을 정도로 소탈한 면도 있다”고 말했다. 친구나 아버지처럼 다가서는 김 회장의 스타일이 ‘꼰대’를 싫어하는 젊은 직원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는 설명이다.
김 회장은 최근 지역 주민의 반발로 개장 후 폐쇄됐던 서울 용산 경마 장외발매소 건물을 농어촌 출신 대학생을 위한 기숙사로 전환할 것을 결정했다. 또 말 산업 관련 청년 창업을 지원하는 청년 스타트업 공간도 조성한다. 마사회의 말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는 소방관을 위한 ‘힐링 승마’로 활용하기로 했다.
이들 정책은 한결같이 ‘승마’나 ‘경마’가 갖는 대중의 거부감을 완화시키는 방향성을 갖고 있다. 어려운 계층이나 청년층에게 다가서는 마사회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평가다.
김낙순 회장이 낙하산 논란을 조기에 해소하면서 긍정적 시선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자수성가형 리더’라는 그의 경력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과부 속사정은 과부가 안다”는 속담처럼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사회적 성취를 이뤄낸 김 회장이 일반 국민의 눈높이에 맞춘 마사회의 개혁을 수행하기에 적임자라는 우호적 분석도 나온다.
김 회장은 1957년 충남 천안 풍세라는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가정 형편이 넉넉지 않아 검정고시로 중학교 과정을 이수한 뒤 천안농업고등학교(현 천안제일고)를 졸업했다. 늦은 나이에 서경대학교 철학과로 편입한 그는 2년여 간 철학을 공부했다.
정치인으로서의 소양을 다지기 위해 고려대학교 정책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을 연구했다. 이후 서경대학교로 다시 돌아와 문화예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 소지자이지만 그 학위는 경제적 여유와는 거리가 먼 ‘고난의 산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치에 대한 뜻을 펼치기 위해 1980년대 중반 신한민주당 중앙당 연수부장으로 첫 발을 딛었다. 이후 통일민주당 중앙당 경리부장, 평화민주당 대통령선거대책본부 유세 부위원장, 김영배 전 국회부의장의 보좌관, 서울시의회 의원을 지냈다.
이 같이 오랜 세월 동안 정치 현장에서 뛰었지만 국회진출은 뒤늦게 이루어졌다.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후보의 선거대책위원회 국민참여본부 기획위원으로 참여했던 김 회장은 이듬해 제17대 국회의원(서울 양천구 을, 당시 열린우리당) 선거에서 당시 현역의원이었던 오경훈 의원을 400여표 차이로 누르고 당선돼 국회로 진출했다. 간발의 차이로 승리한 것이다.
국회의원 시절에는 전반기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하반기 행정자치위원회, 교육위원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등에서 활동했다. 과기위에서는 KT의 무선재판매사업 문제점과 통신시장의 정상화를 위한 정채 자료집을 2권이나 내는 등 의정활동이 활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밖에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를 주축으로 친노 성향 의원들이 만든 국민참여연대에서 활동하고, 국민의 길이라는 모임의 운영위원도 지냈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는 당시 한나라당 김용태 후보에게 2000여 표차이로 밀려 낙선했다. 그러나 정치활동은 계속했다. 민주당 대표나 최고위원 선거가 있을 때면 정동영 의원과 박영선 의원을 도왔고, 2011년에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박원순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본부장, 2012년 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조직위원장 등을 맡기도 했다.
또 김한길 전 원내대표와 함께 통합신당을 만들어 사무부총장을 지내다 다시 대통합민주신당에 합류하기 위해 통합민주당을 탈당하기도 했다. 정동영 민주평화당 의원,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 등과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김 회장은 현역의원 시절 정동영계로 분류됐다.
그는 19대 총선 민주통합당 조직위원장, 2017년 문재인 대선 후보 조직본부 부본부장 등 선거를 치를 때마다 중책을 맡아 조직표를 효과적으로 결집시킴으로써 ‘조직의 달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서민의 아픔과 정서를 꿰뚫고 있어야 정치현장에서 ‘조직 전문가’로 성공할 수 있다고 한다. ‘조직의 달인’이라는 김 회장의 경력이 마사회 개혁이라는 과제를 수행함에 있어서 긍정적 변수로 작용할 것이라는 기대가 적지 않다.
<원문 출처>
뉴스투데이 http://www.news2day.co.kr/1087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