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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의 흙수저 소프라노 유럽 무대 샛별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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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베로나 고대로마 원형경기장 앞에서 포즈를 취한 소프라노 여지원씨.

문자 그대로 ‘작열하는’ 태양이 지면에 내리꽂히는 한낮, 이탈리아 베로나의 고대로마 원형경기장 앞에서 소프라노 여지원(38)을 만났다. 올해로 105년을 맞은 베로나 오페라 페스티벌에서 그는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 중 사랑에 목숨을 던지는 류(Liu) 역을 맡았다. 한국 출신 성악가로 베로나 오페라 페스티벌에서 주요 배역을 맡은 것은 이례적이다.

“12년 전 이탈리아에 처음 왔을 때, 베로나 페스티벌을 봤어요. 제일 싼 학생표를 사서 낮 12시부터 줄을 섰지요. 하루 종일 햇볕에 달궈져서 따끈따끈한 꼭대기 돌 좌석에 앉아서도 너무 좋았는데, 그 무대에 제가 서다니….”

여지원은 유럽 오페라 무대의 샛별이다. 2013년 이탈리아 라벤나 오페라 페스티벌에서 베르디의 ‘맥베스’로 데뷔한 이래 지난해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아이다’에서 아이다로 화려한 조명을 받았고 올 여름 베로나 오페라 페스티벌 ‘투란도트’ 무대에 섰다. 한국에는 세계적 지휘자 리카르도 무티를 통해 알려졌다. 2016년 봄 무티가 한국에 왔을 때 누군가 한국 출신 성악가의 유럽 무대 가능성을 묻자, 무티는 주저 없이 ‘여지원’ 이름을 댔다. 2017년 4월 무티와 함께 한국 무대에 섰고, 지난 2월 신년음악회에 출연하면서 국내에도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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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란도트’ 공연 장면.

여지원의 공연 일정은 내년 가을까지 거의 차 있다. 지난 7월 중순 리카르도 무티의 상임지휘 50주년 기념 공연으로 라벤나와 피렌체에서 오페라 ‘맥베스’를 콘서트 형식으로 공연했고 11월에는 미국 시카고에서 역시 무티의 지휘로 베르디 ‘레퀴엠’ 공연이 있다. 소프라노 솔로가 좋아 꼭 하고 싶던 작품이다. 무티와 함께하는 ‘레퀴엠’ 공연은 내년 2월 일본, 4월 베를린 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독일 바덴바덴 페스티벌 공연으로 이어진다. 2020년 100주년을 맞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도 그를 초청했다. “이렇게 공연 여행으로 꽉 짜인 일정이 정말 감사해요. 로마, 베네치아, 잘츠부르크같이 가장 아름다운 도시들을 다니며 공연하거든요. 정작 저는 컨디션 관리 때문에 집과 극장만 오가지만요.”
   
여지원의 진면목은 ‘화려하지 않은’ 그의 경력에서 출발한다. 그는 절실함에 기초한 도전과 노력, 자기 발전을 통해 자신이 꿈꾸었던 오페라 무대로 올라가고 있다. 얼마나 많은 물질적·사회적 자산을 지원받고 있는지에 따라 금수저에서 흙수저, 심지어 무(無)수저까지 수저계급론이 판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소프라노 여지원의 존재 방식은 뚜렷한 의미를 지닌다. 그는 소위 명문대학을 나오지도 않았고, 천재적인 성악가로 조명받은 적도 없다. 고등학교 3학년 올라가기 직전 “노래가 좋아서” 성악을 시작했고 그 뒤로 20년째 “노래를 잘하고 싶다”는 목표만으로 자신의 위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노래는 타고나서 잘하는 사람과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사람, 두 종류가 있는데, 저는 두 번째 같아요. 타고난 게 좋은 사람은 쉽게 잘 출발하지요. 저는 눈에 띄게 타고난 게 아니어서 더 노력합니다.” 그가 라벤나에서 데뷔한 것은 이탈리아로 유학한 지 8년 만이었다. 학연도 지연도 후원자도 없이, 그야말로 노력의 결실이었다.

미국의 음악가 스티브 레이시는 “소프라노는 플루트, 바이올린, 클라리넷 소리를 다 갖고 있으며, 때로는 테너의 요소와 심지어 바리톤의 강렬함까지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그만큼 소프라노의 목소리는 깊이 있고 다채로운 인간 최고의 악기이다. 화려한 콜로라투라, 서정적인 리리코, 극적이고 강렬한 드라마티코로 구분하기도 한다. 여지원은 리리코에 가깝지만, 드라마티코의 특성도 지니고 있다는 평을 듣는다. 그는 자신의 특성이 오페라 초기 형태인 ‘레치타르 칸탄도’ 정신, 즉 노래하며 연기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예쁘게 하는 게 아니라 ‘표현력’에 중점을 둔다. ‘표현’과 ‘연기’를 할 수 있는 오페라에 집중하는 이유다. 그런 목소리와 표현을 지니기 위해 그는 요즘도 모데나 음악원에서 만난 스승 라이나 카바이반스카를 사사하고 있다. 여지원은 자신의 강점과 약점도 설명했다. 강점은 가사 전달력이 좋고 저음부터 고음까지 결이 같다는 것. 무티는 이를 “시원하게 뻗는 고음”이라고 평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느끼는 게, 노력도 타고난 것인가? 지치지 않고 가는 것도 쉽지 않은 능력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베로나 뒷골목의 소박한 식당에서 여지원은 ‘체력보강용’이라며 송아지고기 구이를 주문했다. 5년 전 한인성당 찬양대에서 만나 결혼한 남편 김영호씨가 권한 메뉴다. 바리톤으로, 성악가의 길을 함께 가고 있는 김씨는 따뜻한 시선으로 여지원의 말에 추임새를 넣었다. “그렇지, 그게 아주 큰 능력이야.” 약점은? 남편이 대신 답했다 “자기가 얼마나 잘하는지 잘 모르는 게 약점입니다.”

여지원은 꾸밈없고 당당했다. “저는 소위 말하는 엘리트 코스라는 것을 걸어온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엘리트 코스라는 걸 밟아서 가는 분들도, 남들이 보면 쉬운 길을 가는 것 같지만, 그분들도 힘들어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이거예요. 꿈을 이루는 데, 그러니까, 무언가 하고 싶은데, 꼭 좋은 대학, 최고의 직장에 가야만 그걸 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거예요. 여건이 안 된다고 좌절하기보다 시간 쪼개 아르바이트하고 그러면서 행복했거든요. 강한 의지와 꿈이 있으면 그걸 이루기 위해 쏟아붓는 시간이나 노력이 아깝지 않아요. 재능은 소진해버리기 쉽지요. 생각해보니까 저는 타고난 재능이 부족했기에 늘 남아서 연습하고 공부하고 고민했는데, 그렇게 지치거나 포기하기 않고 계속하는 게 제 재능 아닌가 싶어요.”

그는 서경대 성악과 1회 입학생이다. 그런데 지금은 모교에 성악과가 없다. “저 졸업하고 몇 년 있다 폐과가 되었어요. 성과를 내야 하는데, 예술이 바로 성과가 나오는 게 아니잖아요, 그게 바로 안 되니까 없애버린 거죠.” 그래서 학연을 통한 인맥도 없다. “뭐 연결되는 데가 없으니까. 제가 뭘 했을 때도 연락할 곳이 없잖아요. 그래도 다 알아서 연락해주시더라고요. 제일 먼저 조선일보 음악담당 기자가 인터넷으로 해외 소식 체크하다가 제 이름을 확인하고 연락을 해왔어요.”

세계적 지휘자 리카르도 무티와의 인연은 여지원의 이탈리아와 유럽 무대 진출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첫 만남은 2013년 라벤나 오페라 페스티벌의 ‘맥베스’ 오디션 때다. “크리스티나 무티라고, 리카르도 무티의 아내가 라벤나 페스티벌 총감독이자 연출로 오디션을 했어요. 맥베스 부인의 아리아 한 곡을 불렀는데, 마침 그곳에 와 있던 무티가 보러 왔어요.” 5년 전을 회상하는 여지원이 침을 꼴깍 삼켰다. 극적인 순간이었다. “살아생전 한 번 만나 볼 수나 있을까, 했던 마에스트로(거장)였거든요. 너무 떨려 얼굴도 제대로 못 들고 아리아를 다시 한 번 불렀어요.” 마에스트로는 여지원의 노래를 다 듣고, 몇 군데 표현에 대해 의견을 낸 뒤 역할에 잘 어울린다며 계속 열심히 하라고 격려했다. 여지원은 이 사건을 평생 못 잊을 일로 기억한다. 무티는 2015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공연할 베르디의 ‘에르나니’ 주역 엘비라를 노래할 사람을 찾다가 ‘그때 그 처음 본 소프라노’를 기억해냈다.

여지원은 ‘맥베스’의 맥베스 부인, ‘아이다’의 아이다, ‘투란도트’의 류, ‘나비부인’의 초초상, ‘지오반나 다르코’(잔다르크)의 지오반나, ‘일트로바로레’의 레오노라, ‘레냐노전투’의 리다 등 숱한 주역을 맡아왔다. 그 가운데 류와 푸치니 오페라 라보엠의 미미 정도를 제외하고는 ‘예쁘고 여린’ 역할이 드물다. “제 목소리가 서정적이고 부드럽지만 강인한 표현을 지녀서 그럴 거예요. 베르디의 여주인공들은 가슴에 불을 품고 있어요. 저도 그래요.” 여지원은 이번 베로나에서 연기한 류야말로 진정 강인한 여성의 상징이라고 말했다. “진정한 사랑을 위해 자신을 버릴 수 있는 류는 진정 강한 여성 아닐까요. 신분 차이가 커서 왕자에게 자신의 사랑을 내보이지 못했지만 그 여자가 갖고 있는 사랑은 죽음도 두려워 않는 사랑이지요.”

목소리와 표현력을 말하다 자신의 성격으로 이야기가 넘어갔다. 여지원은 자신이 수줍음 많고 내성적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세계적 소프라노 안나 넵트렌코와 더블 캐스팅되어 함께 지내면서 자신을 더 잘 볼 수 있었다. “넵트렌코는 파티도 다니고, 쇼핑도 다니고 아주 활기 넘치는데, 저는 공연에만 몰두했어요. 긴장 때문에 다른 건 못 하겠더라고요.”

여지원의 도전은 계속된다. 지금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베르디, 특히 ‘레퀴엠’이다. “소프라노 솔로가 너무너무 아름다워요. 그 노래를 제가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정말 노래를 잘하고 싶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이탈리아와 한국에서 마에스트로의 지휘로 ‘레퀴엠’을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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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연 개막을 기다리는 관객들.

여지원이 류로 출연한 지난 6월 30일 ‘투란도트’ 공연에는 2만여 관객이 원형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6월 하순 시작해 9월 초까지 계속되는 베로나 오페라 페스티벌(Arena di Verona Festival)은 고대 로마제국이 세운 원형경기장(Arena)에서 베르디, 푸치니 등 이탈리아가 낳은 대표적 음악가들의 오페라를 공연한다. 야외공연이지만, 마이크나 스피커 등 음성증폭장치 없이 순수한 육성으로 승부한다.

“공주님, 들어주세요!
당신의 얼음 같은 냉정함은 겉모습뿐…
당신이야말로 그분을 사랑하게 될 거예요!
이 새벽이 오기 전에 저는 피곤에 지친 눈을 감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을 이기고 싶으니까요.”

투란도트 공주는 티무르 왕자의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 그를 사모하는 여종 류를 붙잡아 고문한다. 류는 이름을 말하지 않으려고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공연은 이미 한밤을 넘겼다. 7월 1일 0시40분, 여지원이 공주를 향해 부르는 아리아 ‘당신은 얼음에 싸여 있군요(Tu che di gel sei cinta)’가 강렬하게 밤공기를 갈랐다. 깊고 둥근 목소리는 마이크 없이도 좌석 곳곳에 부드럽게 전달되었다. 사랑의 승리를 선언하는 노래가 잦아드는 순간, 우레와 같은 박수와 “브라바!!” 함성이 터져나왔다. 관객들은 발을 구르며 환호를 보냈다. 1913년 시작된 베로나 오페라 축제 역사에 새로운 한 페이지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6월 30일 밤 9시20분 시작한 ‘투란도트’ 첫 공연에서 소프라노 여지원은 한국 출신 성악가로 첫 주요 배역을 기록했다.

<원문 출처>

주간조선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002518100018&ctcd=C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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