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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주
서경대 명예교수·정치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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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가상존보 옥보(高宗加上尊號玉寶)

올해 을사년 2025년은 대한제국이 1905년 을사늑약으로 사실상 주권을 상실한 지 120년이 되는 해이다. 현 시점에서 일제강점의 전초였던 뼈아픈 역사를 다시 끄집어 내는 이유는 모든 국민이 ‘대한민국을 지켜 달라’, ‘대한민국을 바로 세워 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대한민국은 우리 민족이 피와 땀으로 일궈낸 삶의 터전이다. 

1919년 3.1 항일운동과 1950년 한국전쟁,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금모으기 운동 등에서 보여준 한국인의 저력은 세계인이 감탄하고 놀랄 정도였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위기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전환을 맞이하려고 노력해 왔다. 

대한제국은 ‘망국사’가 아니라 ‘수난사' 

대한의 국호는 ‘중화적 세계관에 머물렀던 조선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이에 벗어나 어느 국가에도 구애받지 않고, 세계 만국공법에 자주적으로 참여할 정당성을 지닌 행위 주체’라는 국가 정체성을 담고 있다. 즉, 대한제국은 근대화의 역사이며, 일제에 주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온 힘을 쏟았던 외교의 역사이다.

대한민국의 국호 전신이 ‘대한제국’이라는 사실을 우리 국민은 얼마나 인지하고 있을까. 이름이 그 사람의 정체성을 상징하듯이 국호도 마찬가지이다. 대한제국의 부정은 대한민국의 부정으로 이어진다. 

1919년 3월 1일 한반도 방방곡곡에 울려 퍼졌던 “대한독립만세”는 온 민족이 염원했던 ‘대한’의 독립이었고, 그러한 민족의 염원은 임시정부 국호에 반영되어 1945년 해방 이후 대한민국으로 계승되었다.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은 빼앗긴 ‘대한’을 다시 찾기 위해 치열한 삶을 살았다. 비록 주권을 빼앗겼으나 대한인의 정체성은 잃지 않았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당대인들은 대한제국을 부인하지 않았으며, 스스로를 ‘조선인’이 아니라 ‘대한인’과 ‘한국인’으로 인식했다.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은 대체로 조선사와 대한제국사를 혼동한 채, 식민사관에 갇혀 대한제국을 망국사로 인식하고 있다. 

분명한 역사적 사실은 대한제국은 ‘망국사’가 아니라 ‘수난사’이다. ‘망국사’적 역사 인식은 정한론과 왜곡된 고종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전제된 식민사관의 덫이 씌워져 있다. 반면 ‘수난사’적 역사 인식은 한국사의 전개 과정 속에 내재된 근대적 맹아를 계승하면서, 근대화를 위한 점진적 발전 모색에 주목하였다. 다만 부국강병 수준이 일제보다 뒤처져 주권을 빼앗겼다는 인식이다. ‘수난사’적 관점은 고종의 근대화에 대한 의지와 개혁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제국주의의 질서 속에서 국력의 한계를 고찰하는 균형적 상황인식이다. 이태진 선생이 밝힌 ‘규장각 중국본 전체 6만7천여 권 중에서 고종의 서재인 집옥재 장서인이 찍힌 것이 4만권이다. 이는 고종이 친정체제로 들어가기 전부터 중국 서점으로부터 구입한 것으로, 한문으로 번역된 서양문물을 소개한 책이 많다’는 사실이 고종의 근대화와 개혁에 관한 관심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확인해 준다.

대다수 한국인은 대한제국을 망국사로 기억한다. 이것은 식민사관에 기저한 것으로, ‘집권층 특히 군주 고종의 무능으로 나라를 일제에 빼앗겼다’는 인식이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일제강점이 일본 지배층의 국가목표이념인 ‘정한론(征韓論)’의 실현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日, ‘대원군vs명성황후 대립구도’ 고종 폄훼

정한론은 ‘한반도를 일본의 고토(故土)로 인식하고, 침략을 통해서라도 그 땅을 회복해야 한다’는 제국주의적 영토확장론이다. 일본 지배층의 국가목표는 이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19세기에도 정한론은 단지 시기와 방법을 둘러싸고 이견을 보였지만, 항상 일본 지배층 내에서 논의의 중심이 되었다. 특히 1876년 개항 이후 정한론을 실현하기 위한 방책이 일본의 대한정책의 기조를 이루었다. 한반도강탈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일제는 이를 수행하기 위해서 대한제국을 무력화하고, 대한제국 멸망에 대한 책임을 특히 고종에게 전가했다.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대립구도’를 만들어 고종을 무능한 군주로 이미지화 하는 것이 일제의 획책이었다. 명성황후의 죽음도 이러한 배경에서 일제가 자행한 만행이다. 일제는 대원군을 영웅으로, 명성황후와 고종은 패륜의 여성과 무능한 군주로 만들었다. 대한제국의 강점을 위해 이렇게 한 이유는 고종이 근대화를 지향한 개혁군주이며, 고종의 최고 조력자가 명성황후였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은 일제의 강탈을 막지 못했지만, 18세기 영·정조 시대 부흥기의 개혁과 왕권강화를 계승하여 새로운 근대자주독립국가를 추진했던 우리의 역사이다. 
 18세기 개혁군인 영·정조 대는 근대를 지향하는 내적 기반과 자주적 역량이 싹튼 시기이다. 내적으로 서얼허통 등 조선사회의 경직성을 완화하는 사회적 변화가 있었으며, 민의 사회의식이 성장하였다. 대외적으로 서구문물이 지식인 사회에 침투되던 시기이다. 

이때 성선설에 입각하여 인간을 이해하는 주자학적 인간론이 다산의 경험론적 인간론으로 전환된다. 다산은 ‘성(性)을 선(善)으로 이해한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은 잘못된 해석이라 비판하면서, 성은 결정론이 아니라 선악을 행할 수 있는 가능태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의 선악 행위 선택은 인간 자신의 자주지권(自主之權)에 맡겨져 있다는 것이다. 

인간론의 변화는 당시 사회 상황과 맞닿아 있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저항소설 <홍길동전>, 주모의 딸과 고을 수령 아들과의 사랑 이야기인 <춘향전>, 양반의 허세를 비꼬는 <양반전>, 여자 기생을 주제로 한 신윤복의 그림 등은 당시 사회규범인 신분 구조를 비판하고 있다. 이처럼 민의 의식성장은 문화계로 확산되었으며, 정조의 위항문학(委巷文學)의 지원정책도 당시 시대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영·정조시대의 탕평책은 민국론을 내세워 왕권강화를 꾀하고, 사회 개혁에 박차를 가하는 상징정책이었다. 그러나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은 퇴행적인 세도정치의 회귀를 가져왔으며, 민국론에 기초한 개혁과 왕권강화는 다시 힘을 잃었다. 

고종의 치세기간은 19세기 중엽 문명사적 전환기이며, 제국주의 팽창주의 시대였다. 즉위 10년 후 1873년에친정체제로 돌입하면서 고종은 근대화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개화의 선구자 박규수를 우의정으로 임명하고, 젊은 엘리트들을 중국·일본·미국 등으로 보내 서구 문물에 대한 견문과수용성을 넓히도록 했다. 200년 이상 지연되어온 경복궁 중건이 왕실 위엄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라면, 1873년 신하의 반대에도 사비로 지은 건청궁은 전통 위에서 서구 문물을 수용하겠다는 고종의 근대화 의지의 상징이었다. 

고종의 근대화…중·일보다 電氣 2년 앞서

고종은 1885년 최초 전신선 서로전선 준공을 기점으로, 남로와 북로 전신선 등 통신 분야 발전에 힘을 쏟았다. 통신망 구축은 새로운 문물을 수용하는 데 중요한 기지 역할을 한다. 특히 188(고종 25)년 준공된 남로전신선은 일본의 압력과 방해가 있었지만, 행정 연락의 효율성을 고려하여, 조선전보총국의 주관 하에 독자적으로 가설되었다. 노선의 경로는 한성에서 충청감영의 소재인 공주와 전라감영이 있던 전주를 경유하여 대구·부산에 이른다. 전기는 1887년 3월 6일 건청궁에 설치되어 중국이나 일본 궁정보다 2년 앞섰다.

이 같은 고종의 근대화에 대한 의지는 한반도 강점을 통해 정한론을 실현하려는 일제에게 큰 걸림돌이 되었다. 

일제는 1894년 무력도발을 감행하여 경복궁을 습격하고 고종을 감금하였다. 청일전쟁의 명분과 물자동원을 위한 ‘청군구축의뢰서’에 강제로 도장을 받으려 하였으나, 고종과 대원군 그 누구도 응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청군구축의뢰서’는 나오지 않고 있다. 청일전쟁의 명분과 조선에서 전쟁의 물자와 물자동원 인원을 구축하려는 청군구축의뢰서는 고종과 대원군 모두 도장을 받지 못한 상태이다. 을사늑약이나 한일병합 문건이 제목도 명칭도 비준서도 없는 비정상적인문건이라는 것을 이태진 선생이 밝혔다. 그 결과, 2010년 한일 양국 학자 1,114명이 ‘한일병합조약무효성명’을 공동으로 발표하였다.

고종은 일제의 포로 상태에서 벗어나 아관파천을 행한 후 1년여 만에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환구단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대한제국 반포의계기는 경복궁 습격과 갑오경장, 그리고 을미사변과 의병운동이다. 을미사변 이후 일제는 왕까지 살해할 수 있는 폭력적인 침략자라는 것을 여실히 드러냈다. 따라서 아관파천을 단행한 것은 불가피하고도 현명한 처사임을 당대 많은 조선인들이 지지를 보낸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청과 일본으로부터 독립, 그리고 세계 열강과도 동등한 나라임을 표징한 ‘칭제’ 요청의 상소도 1년 간 지속되었고 전국적으로 유생으로부터 서울의 시전상인, 그리고 전·현직 관료로 파급되는 등 대한제국의 선포는 국민적 지지 속에 이루어졌다. 또한 근대적 토지소유권을 인정하는 정책으로 평가된 대한제국기의 양전지계사업(量田地契事業)을 비롯하여, ‘구본신참(舊本新參)’에 토대를 둔 여러 정책을 ‘수구반동’이 아니라 ‘광무개혁’으로 긍정적인 평판을 하는 것이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일부 경제사학자를 제외한 현재 학계의 대체적인 기조이다. 

대한제국은 이처럼 영·정조 대 민국으로 향하기 위한 개혁과 왕권강화를 다시 계승하여, 한반도의 자주독립을 지키려 했던 시기이다. 일제는 대한제국의 주권을 강탈하고 대한제국의 흔적을 지우려 했다. 한국사를 왜곡하기 위해 설치된 일제의 관변 기관 명칭도 ‘한국사편수회’가 아니라 ‘조선사편수회’였다. 일제는 철저하게 ‘대한제국’ 또는 ‘한국’의 명칭을 지웠다. 우리 민족의 호칭조차 ‘대한인’도 ‘한국인’도 아닌 ‘조센진(조선인)’이었다. 일제는 ‘대한제국사’를 망국사로 폄훼하고, ‘수난의 역사’를 ‘치욕의 역사’로 둔갑시켰다.

‘대한제국’은 근대화와 주권 지키려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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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후 임시의정원이 임시정부의 국호를‘대한민국’이라 했던 것도, 일제에 빼앗긴 ‘대한’을 찾기 위함이라고 그 배경을 설명했다. 이 국호는 오늘날 대한민국으로 계승됐다. 

1883년 태극기를 국기로 제정한 고종은 1897년 ‘대한’이란 국호도 건의하여 신하 간 논의 끝에 결정하였다. 조선도 중국·일본·러시아 등 다른 나라와 대등한 자주독립 국가이므로 이에 걸맞은 국호가 필요하다는 취지에서였다. ‘우리나라는 삼한으로 천명을 받고 하나로 통합한 나라이며 외국도 조선이라 하지않고 한(韓)으로 명시하고 있기에, 대한은 천하가 모두 알고 있는 국호’라는 사실이 ‘승정원 일기’에 기록돼 있다. 대한의 국호는 ‘중화적 세계관에 머물렀던 조선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이에 벗어나 어느 국가에도 구애받지 않고, 세계 만국공법에 자주적으로 참여할 정당성을 지닌 행위 주체’라는 국가 정체성을 담고 있다. 즉, 대한제국은 근대화의 역사이며, 일제에 주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온 힘을 쏟았던 외교의 역사이다.

그렇다고 주권을 빼앗긴 대한제국의 아픈역사마저 무조건 미화하는 국수주의에 함몰되어서는 안 된다. 최초로 근대 자주독립국가를 지향했지만, 결국 일제에 주권을 빼앗긴 대한제국의 역사를 ‘망국사’가 아닌 ‘수난의 역사’임을 후대에게 제대로 알려야 한다.

미래 대한민국을 위해 정부는 ‘식민사관 청산’과 ‘역사바로세우기’에 대폭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동시에 교육 현장에서도 이념과 정파를 초월해, 후대에게 올바른 역사교육을 해야 한다.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은 나라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대한제국의 역사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은 나라를 지키는 정초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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