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욱 서경대 특임교수
바쁜 일 없는 사람에게 순백의 눈과 함께 시작하는 아침은 축복이다. 이른 아침 창문을 열어제꼈을 때, 창호지 바른 여닫이 문이 아니어도, 한아름 풍겨오는 삽상한 내음과 뜰 앞에 전개되는 눈 부신 백설의 정경은 그대로 성결한 사원이다. 어린 시절 어느 한 사람도 그 어떤 이야기도 의심한 적 없던 내 영혼, 그 새하얀 바탕 위에 무늬졌던 천진한 소망이 살아난다.
순간, 불만의 계절은 가고 새로운 다짐의 시간이 된다. 그토록 속고 또 속았음에도 다시 한번 믿어 볼 마음이 생긴다. 그대와의 관계나 가정에서, 기업이나 사회에서 모든 고운 결실의 기초는 믿음이니, 어떤 작은 환희도 그것에서 벗어난 것은 없다. 안 좋은 것은 믿음이 시험을 받는 것이다.
믿음은 사람의 선한 노력과 기대가 보상을 받지 못할 때 흔들린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라 했으니 믿음의 결과가 보기 좋은 모습으로 결실을 맺지 못하면 사람은 의심하기 시작한다. 피땀 흘린 노력 앞에 성공의 어머니 대신 실패의 마녀가 버티고 섰거나, 아무리 따져보아도 나쁜 짓은 한 게 없는데 내딛는 자국마다 가시밭길일 때 그는 낙망한다.
“신이 있다면 왜 착한 사람이 고통을 받는가?” 인간이 가장 오랫동안 고민해 온 질문 중 하나이다. 전지전능한 신이 있다면, 꼭히 신이 아니라도 순리라는 게 있고 인과응보라는 게 있다면, 남을 속인 적도 없고, 게으름도 피우지 않고, 불우한 이웃을 도와가며 살아왔는데, 왜 이리 매사가 어긋나기만 하고 주위엔 모진 이들만 득시글대는가?
성경에는 착하고 믿음 좋은 욥이라는 사내의 이야기가 나온다. 비록 욥이라 하더라도 그에게 불행이 이어지고 고통이 산처럼 쌓인다면, 그래도 하나님을 믿으며 감사해 할까? 라며 사탄이 하나님에게 내기를 건다.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사탄은 하루 만에 욥의 자식 열 명과 양, 낙타 등 일 만 마리의 가축을 포함하여 전 재산을 빼앗아버린다. 그의 믿음이 끄떡없자, 다시 사탄은 무서운 피부병으로 그를 아픔 속에 몰아 넣는다. 욥은 너무나 큰 고통에 차라리 목숨을 거두어 달라며 절규한다. 욥은 아내의 질책까지 받으면서도 끝내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않겠느냐.”며 믿음을 놓지 않는다. 왜 하나님은 신실한 자녀인 욥에게 참혹한 고통을 면하여 주지 않았을까? 기껏 사탄과의 내기에서 이기기 위해 그리 했을까? ‘욥기’는 인간의 실존적 주제의식으로 성경이기 전에 문학적으로도 높게 평가받는다. 비단 욥이 아니라도 우리는 자주, 너무나 많이 욥의 처지에 놓인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죄 없는 제가 이토록 큰 고통을 받아야 합니까?”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하늘에 매일매일 울려 퍼졌던 그 절규다. 일본군 위안부들과 강제 징용의 참혹한 현장에서도, 1.4 후퇴 때 흥남부두 뱃머리에서도, 아니 당장 음압 병동의 코로나19 확진자들의 입에서도 나왔을 그 부르짖음이다.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감당할 만한 고난만 주신다’고 했지만, 우리는 감당하지 못할 고통에 몸부림쳐 온 많은 사연들을 기억하고 있다. 하나님 대신 부처님이어도, 천지신명님이어도, 자연의 섭리여도 상관없이 이 질문은 인간에게 가장 어렵고도 근원적인 물음이다.
그럴 때 우리는 원망한다. “왜 하필이면 나냐(Why Me)?”고, 그러나, 그러나... 잠시 멈추어 이기심 가득한 가슴을 비우고 귀를 기울이면 저 높은 곳에서 들려 오는 음성이 있을 것이다. “왜 너이면 안되는데(Why Not)?”. 미국 대통령 당선자 조 바이든이 아내와 두 딸을 잃고 절망에 빠져 있을 때 그의 아버지가 건네 준 두 컷 짜리 만화에 나오는 그 음성이다.
불행은 누구에게나 찾아 온다. 여느 해나 그렇듯, 금년에도 착하고 열심히 살아 갈 그대에게 좋은 일만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코로나19의 두려움이, 오만한 권력의 독선이, 안정될 기미 없는 부동산 시장과 더욱 곤궁해질 살림살이의 고통이 예상된다.
그때 생각하라. 어차피 나에게 주어진 것, 행운이든 불운이든, 나 혼자 힘으로 된 것은 없다. 자연과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계실지도 모를 신의 보살핌이나 무관심으로 그리 된 것이다. 무엇보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착하게만 살아 온 그대에게 깜부기 같이 허무한 재물과 명예 한 주먹 쥐어주는 것으로 때워버린다면 대접이 너무 허술한 것 아닌가. 또한 언제나 그렇게 응보의 계산이 에누리 없이 정확하게 이루어진다면 삶은 또 얼마나 재미가 없을 것인가. 누가 신을 찾고 조상님께 제사하겠는가. 언제 어디서나 착하고 신독(愼獨)한, 그런 멋진 사람에겐 진정으로 높고 귀한 선물이 주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 온유와 평강, 자애자족, 유유자적, 스토아 철학의 아파테이아(apatheia), 에피쿠로스 학파의 아타락시아(ataraxia), 열반이나 천국의 복락 같은, 우아한 기쁨 말이다. 두려움 속에 시작된 새해, 백설처럼 정결한 마음과 믿음으로 나서 보자.
<원문 출처>
e대한경제신문 https://www.dnews.co.kr/uhtml/view.jsp?idxno=20210110134110972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