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대학교 권재욱 특임교수
봄의 입구를 지나고 얼었던 강물이 풀리고 내일모레면 개구리가 잠에서 깨어날 텐데, 썰렁한 대지는 여전히 겨울 한복판이다. 벌 서는 아이처럼 앙상한 가지들만 들어 올린 채 추위에 떨고 섰는 나무는 그렇다 쳐도, 왁자지껄 붐비던 사람들보다 빠져나가는 바람이 더 많은 거리에서 잔뜩 웅크린 나의 몰골이 오도카니 드러나는 것이 내가 이 계절에 마음을 줄 수 없는 이유이다.
가릴 게 없다는 것, 숨을 곳이 많지 않다는 것은 겁나는 일이다. 삶에 대한 구차함이 여지없이 까발려지고, 하찮게 여기던 미생물에 덜미 잡혀 오도가도 못하게 된 나의 처지가 참으로 미운 것이다. 떨쳐 버리려고 하면 할수록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의심과 불안과 혐오, 나의 감각은 잠자리의 더듬이보다 예민해지면서 사방으로 번뜩이며 촉수를 뻗는다. 그 불안한 얼굴에 공포가 얹혀지면 세상은 추위가 아니어도 벌벌 떨며 눈치보며 격리된다. 만에 하나 혹시나 하는 나의 안위에 불우한 이웃의 고통은 어느새 오불관언(吾不關焉), 모른 척 하는 뻔뻔함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참으로 불쌍하고 가엾다, 이 내 몰골이….
예전의 겨울은 사람의 정신을 가만히 집중하게 했다. 겨울엔, 사방이 얼어붙는 겨울엔 안으로 안으로 침잠한다. 원래 바깥이 따뜻하면 안이 어수선해지며 나가고 싶어지고, 밖이 춥거나 깜깜하면 안으로 잠겨들며 내실을 찾는다. 오월이 그 화사한 미모로 두서 없이 외출을 부추기듯이 엄혹한 겨울은 명징한 사고의 카페로 우리를 인도했다. 세상의 많은 아름답고 훌륭한 생각들이 겨울에 태어났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란 박용래 시인의 ‘저녁눈’의 너그러운 서정이 그렇고,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의 탐미적 서정도 모두 이 계절에 빚졌다. 바깥 추위에 생각이 안으로 들면 눈은 맑아지고 가슴은 따뜻해진다. 겨울의 서정은 깊은 내면의 각성의 시간을 거쳐 타인으로, 외부에 대한 공감으로, 그리고 생명으로 나아간다. 앙상한 가지 끝에 매달린 구멍 뚫린 나뭇잎 하나, 그것마저 회초리 치듯 휘감아 뜯어가려는 냉랭한 바람의 기세에 생명의 애잔함이 흐른다. 냉기 속의 연약한 생명은 나의 외로움이 되고, 아픔이 되고, 연민이 된다.
사람을 가엷게 여길 줄 아는 마음, 곧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사람의 덕 중에서 으뜸인 인(仁)의 증표라 했다. 안타깝게도 이 계절 거리에는 재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마스크 낀 사람들과 그들이 흘리는 공포로 가득하다. 맹랑한 풍문과 허무한 불안감이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기침과 신열로 도시를 불만으로 채워가고 있다. 한껏 심각하거나 퉁명스런 얼굴로 외면하고, 섣불리 매도하며 매정하게 격리하는 삭막함이 주된 풍경이다. 겁먹은 그들을 사랑스런 딸이 아픈 듯 공감하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은 외면하지 않는 따뜻한 연대, 사람다움을 지켜 갈 수는 없을까? 인격의 뿌리는 연민이니, 사람 사이에 연민이 빠져나가면 그곳은 사막이거나 망망대해 가운데 떠 있는 외로운 섬인 것을.
그런 중에도 우리는 고대하던 백신 같은 아름다운 위로와 희망을 보았다. 우한 교민들을 귀국시키기 위한 비행기에 기꺼이 자진 탑승한 승무원들의 땀범벅된 얼굴과, 우한 교민들을 자신들의 고장에 받아들인 아산과 진천 주민들의 따뜻한 우애는 모처럼 만나는 귀한 감동이었다. 폐렴 확진자와 유증상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감염을 무릅쓰고 애쓰는 많은 의료진들과 담당 공무원들의 눈물겨운 헌신도 아름답다. 그들은 이웃이 당하고 있는 아픔을 위해 자신의 안위를 기꺼이 담보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귀한 모습을 우리에게 선물한 것이다. 눈앞의 이웃의 고통을 모른 척 하지 않는 연민과 공동체 의식, 이것이야말로 이 불안한 시절에 최선의 백신이 아닐까.
그런 마음으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인정해야 할 것은 명백하게 인정하여 쓸데없는 두려움의 그림자를 쫓아버리고 성실하게 대책을 세우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페스트는 멎을 것이다.” 까뮈의 ‘페스트’에 있는 핵심 문장이다. “인간에게는 경멸당할 것보다는 찬양받을 것이 훨씬 더 많다.” 물론 사람이 찬양받을 만한 그것은, ‘페스트’를 이긴 힘, 고통에 놓인 자에 대한 연민과 연대의식, 곧 끝까지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것이다.
권재욱(서경대 특임교수)
<원문 출처>
건설경제신문 http://www.cnews.co.kr/uhtml/read.jsp?idxno=2020030215565915904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