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모델이자 서경대학교 모델연기전공ㆍ예술평생교육원 모델학전공 교수인 주정은, 1994년 여고생 신분으로 SBS슈퍼모델대회에서 (당시 한국슈퍼모델대회) 우승하며 스타로 발돋움, 슈퍼모델 전성기를 연 황금세대의 멤버이다. 찰나의 순간에 완성된 이미지 또는 감성을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모델로서, 다양하고 풍부한 표현력을 가진 만큼이나 역동적이면서 성찰로 빚어진 그녀의 삶을 담아본다.
■ 한국 무용, 이 미친듯한 사랑
▲ 슈퍼모델 주정은의 퍼포먼스는 드라마틱하다. 그 만큼 찰나의 순간에 전하는 연기력과 감성이 발군이다.
이 같은 기교는 어린시절부터 익혀온 한국무용을 접목시키면서 가능했다. 사진은 '내밥이야' CF촬영현장
그녀의 퍼포먼스는 드라마틱하다. 때로는 경쾌한 왈츠처럼, 때로는 격렬한 자이브처럼, 때로는 여성스런 룸바처럼, 강렬한 카리스마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러면서도 우아한 로맨스를 잃지 않는다.
주정은이 모델로서의 이 같은 독자적인 기교를 갖춘 데는 무용의 영향이 컸다.
“무용수가 꿈이었어요. 초등학교 1학년 때 어린이대공원에 놀러 간 적이 있었어요. 그때 또래 여자아이들이 예쁜 한복을 입고 예쁜 화장을 하고 공연하는 것을 구경하게 됐어요. 어찌 그리 부럽던지, 부모님을 몇 개월 동안 계속해서 졸라 한국무용을 배우게 됐죠.”
여덟 살배기 이 어린 소녀는 유리구두를 벗은 신데렐라처럼 춤과의 사랑에 빠져들었다. 살풀이, 장고춤 등 마음 깊숙이 저려오는 자유롭고 격렬한 전통무용과의 사랑이었다. 특히 현란하면서 절제된 ‘태평무’ 춤사위에 관심이 많았다.
“그 시절 저는 무대에서 춤추다 죽고 싶다는 꿈을 꿀 정도로 미쳐있었죠.”
순탄할 것 같던 무용수로의 길은 여고 2학년 때 위기를 맞았다. 키가 갑작스럽게 폭풍성장을 해버리면서 고1 때만 해도 160대 초반에 머물던 키가 몇 달 만에 177cm까지 자랐다. 급격한 골격 변화가 따르면서 거짓말처럼 9년을 갈고닦은 춤 동작이 부자연스러워진 것이다.
“한국무용은 굉장히 섬세해요. 호흡 하나에도 동작이 달라지죠. 이런 와중에 키 때문에 교복 치마가 짧아지면서, 매일 학생주임한테 불려갔어요. 고의로 치마 길이를 줄였다고 의심받은 거죠.”
■ SBS슈퍼모델대회 1등 ‘천재소녀모델’로 떠들썩
▲ 슈퍼모델의 전성기를 연 황금세대 외에도 수많은 타이틀이 그녀를 수식한다.
한국 전통 무용수가 꿈이었던 어린 소녀를 모델계로 이끈 것은 가족이었다.
그 아름다운 춤을 놓을 수가 없어서 종말과도 같은 우울함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3녀중 막내로 위의 두 언니와는 4살, 9살 차이이다. 이 언니들이 주정은을 모델의 세계로 이끌었다. 당시 주정은은 대학입시를 위해 새벽 6시40분 등교, 밤11시 귀가를 철칙처럼 지키던 경기여고 3학년생이었다.
“1994년 평소 연예계에 관심이 많던 두 언니가 SBS슈퍼모델 대회에 나가보라고 바람을 넣었어요. 등 떠밀리다시피 출전하게 됐는데, 예선접수마감인 6월30일 마감 무렵에서야 언니들이 허둥지둥 사진과 원서를 접수했죠.”
SBS슈퍼모델선발대회는 예나 지금이나 명실상부 국내 최고의 엘리트모델 선발대회로 인정받고 있다. 위상도 현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국민적 성원도 높았다. 그렇지만 철부지 소녀에게는 그저 나들이하는 기분이었다.
“모델이란 직업을 제대로 알지 못했어요. 대회 기간 동안 하이힐을 신고 있는데, 발에 물집 잡히고 힘들다고만 생각했죠. 예선통과 성적순위가 저조해 본선에도 올라가지 못할 거라고 믿었고요.”
결과는 놀라웠다. 1천여명의 지원자중 본선진출 33인에 선정된데 이어 고교생 신분 최초로 1등을 거머쥔 것이다. 2개월에 걸친 합숙기간중 평소 한국무용이 전공인 탓에 이상한 팔자걸음을 걸어 스태프들에게 혼쭐나기 일쑤였던 그녀였다.
당시 관계자들에 따르면 대회 당일 워킹 연습 때는 유일하게 지적받지 않을 정도로 빠른 성장속도를 보였다고 한다. 본선진출도 ‘쌍꺼풀도 없고 콧날도 오똑하지 않지만 출전자중 흔치 않은 신선하고 자연스런 용모가 친근감을 준다’며 장래성에 도박을 건 심사위원들의 평가로 가능했을 정도였다.
‘여고생 주정은 SBS슈퍼모델대회 1등’ 이 소식에 전국이 들썩였다. 예나 지금이나 미디어는 10대이면서 천재 게다가 소녀라면 히트상품이란 것을 잘 알고 있다.
심야 토크쇼 SBS 「스타와 이밤을」 등 각종 방송프로그램, 언론매체은 여고생 신분의 슈퍼모델 주정은 캐스팅에 경쟁적으로 뛰어들었다.
심지어 경향신문은 1994년 10월12일자 ‘여고생 연예활동 이대로 좋은가’라는 제하의 기사를 통해 여고생 주정은의 활동을 우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사자인 주정은은 본인의 주변을 둘러싼 일들에 관심이 없었다. 무용대회에 나갈 때마다 큰상을 받았던 탓에 별다른 감흥조차 없었다.
“담담했어요. 그저 모델 언니들하고 제주도ㆍ해외로 촬영가고, 태국 가서 코끼리 탄 것이 좋았을 뿐이에요. 연예인들이 나를 알아봐 주는 것도 신기했고요.”
당시의 그녀는 국내 최고의 슈퍼모델대회 1등이란 타이틀이 주는 무게감조차 모르던 유리구두를 신은 신데렐라였다.
■ 21살의 사춘기와 쌓이는 중압감 그리고 겉도는 시간들
▲ 슈퍼모델로서 방송인으로서 지명도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무겁게 덮쳐온 정체성과 중압감.
그녀의 기나긴 사춘기는 21살에 시작됐다.
“저의 사춘기는 21살 때였어요.”
늦은 사춘기는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란 강한 자의식을 버리고, 자신의 관념 세계와 타인의 관념 세계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자신의 감정이나 경험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이 아닌 같은 세계를 공유한다는 상호교류로 완성된다.
하지만 주정은은 어릴 적부터 무용을 해온 데다, 고교 때 스타모델로 데뷔하다보니 또래들과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적었다.
심지어 학교에 알리지 않고 모델대회에 나갔다고 해서, 퇴학당할 뻔한 위기도 있었다. 다행히 은사들이 두둔해줘 1주일간 반성문 쓰기로 대체됐지만, 몇몇 여학생들에게 미운털이 박혀야 했다. 누가 퍼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생판부지의 남학생과의 열애설 같은 악의적인 헛소문도 심심찮게 떠돌았다.
그럴수록 ‘잘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쌓여갔다. 대학은 원하던 대로 경희대학교 무용학과에 입학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고독해져 갔다.
“좋아하는 무용과에 등록만 했지, 속하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모델 엔터 활동에 바쁘다보니 동기들과도 진솔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요. 저는 어디까지나 ‘주정은 씨’였죠.”
결국, 다음해 휴학계를 제출했지만, 모델계에서조차 겉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유명세를 타면서 무대에 서달라는 요청이 밀려들었죠. ‘슈퍼모델대회 우승자’라는 타이틀과 ‘이른 데뷔’ 이 두 가지가 겹쳐 주변에서는 쟁쟁한 베테랑 모델들과 똑같이 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게 너무나 괴롭고 힘들어서, 언니들에게 자주 투정을 부렸죠.”
슬럼프 아닌 슬럼프가 온 것이다. 사춘기는 그렇게 갑자기 ‘훅’하고 들어왔다.
<계속>
<원문출처>
무비스트 http://www.movist.com/star3d/view.asp?type=32&id=atc0000000027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