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단임제는 망국제도 … 국정농단 원인 됐다”
지금의 한국 사회는 분명 ‘상식’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정권의 ‘비선실세’와 그 무리가 국정을 농단하고, 대통령은 직무가 정지된 채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국민의 분노와 좌절은 현재진행형이다. 국격은 땅에 떨어졌다.
평소 상식의 중요성을 강조한 최영철(82) 서경대학교 총장의 눈에는 이러한 모습이 어떻게 비쳤을까. 지난 20일 서울 성북구 서경대 총장실에서 만난 최 총장은 “헌법에만 맞게 국정 운영을 해도 나라가 안정적일 텐데, 그러지 않아 대통령이 국회에서 탄핵되는, 헌정사의 불행이 빚어졌다”고 진단했다.
최 총장은 전남 나주군 영산포읍에서 태어났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한 뒤 최 총장은 목포로 이사했다. 처음에는 친구들이 나주에서 온 최 총장을 ‘촌놈’이라며 따돌렸다고 했다. 그는 “해방 직후 어머니가 ‘이게 진짜 우리나라 글이다’라며 직접 한글을 가르쳐주신 덕분에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시선이 바뀌었고, 따돌림을 금방 극복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최영철 서경대 총장이 “총장을 4연임하게 된 것은 ‘2등주의 철학’ 때문”이라면서 “지금의 우리 국정과 사회가 극심한 혼란에 빠진 것은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지나친 자기주의 탓”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상윤 기자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했던 최 총장은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 진학했다. 그가 기자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은 것은 우연이었다. 최 총장이 대학을 졸업할 때 즈음 서울대 교정에는 은행과 신문사, 딱 두 곳의 채용 공고가 붙어 있었다. 은행 행원 모집은 공신보증인과 학장추천서 등 조건이 많아 번거로워 보였다. 그래서 최 총장은 신문사 기자직에 지원해 합격했다. 처음에는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해 동아일보로 옮겼다.
주로 정치부에서 기자 생활을 한 최 총장은 34세이던 1969년 역대 최연소 정치부장이 됐다. 지금도 이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기자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최 총장은 혈기왕성했던 막내 기자 시절 부장에게 대든 일을 꼽았다.
그는 “당시 정치부장이 편집국에서 자유당과 이승만 전 대통령을 막 욕하면서도 저녁에 술 마시러 가면 항상 자유당 사람들하고만 어울렸다”며 “그땐 그게 이중인격자처럼 보여 못마땅했다”고 털어놨다.
1973년 정계에 입문해 4선 의원으로 16년간 일하며 국회부의장까지 지내는 동안 최 총장은 ‘야당과 가장 친한 여당 의원’으로 통했다.
그는 “내가 있어서 상대방이 있고, 반대로 상대방이 있어야 내가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며 “내 뜻대로 안 되더라도 상대방에게 협조할 줄 알아야 사회가 제대로 된다”고 역설했다.
최 총장의 이 같은 생각은 ‘2등주의 철학’이라는 그만의 독특한 철학으로 정립됐다. 우리 사회에서는 모두가 1등이 되려고 해 각박해졌는데, 2등이 있어야 1등도 존재하므로 2등으로도 만족할 줄 알아야 오히려 성공할 수 있다고 최 총장은 설명했다. 다만 1등을 하려는 노력은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그는 스스로를 ‘2등 인생’이라고 평가했지만 언론인으로 일할 때는 서슬퍼런 권력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을 정도로 당당했다. 최 총장은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로 청와대에 출입하던 시절 ‘소신은 만능인가’라는 제목의 기사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판했다가 자택 근처에서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그는 “이제 와 생각해보면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게 용할 정도로 상당히 독하게 썼던 것 같다”며 웃어보였다.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한 최 총장은 이후 국회부의장과 체신부·노동부 장관을 거쳐 부총리 겸 통일원(지금의 통일부) 장관까지 지냈다. 지역주의가 뿌리 깊게 박힌 시절 호남 출신 정치인으로는 극히 이례적인 성공가도였다.
최 총장은 기자 시절 테러를 당할 정도로 강골이지만 평소에 ‘상식’을 강조한다. 온 국민을 자괴감에 빠지게 한 최순실 게이트도 상식을 벗어난 국정 운영에서 비롯됐다고 진단했다. 그래서 최 총장은 국정 운영의 상식으로 헌법을 내세운다. 그가 이른바 6공화국 현행 헌법인 ‘87년 체제’의 기초를 다진 것이 영향을 미쳤다.
그는 1987년 현행 헌법을 만들 당시 국회 여야 8인회담의 여당측 한 사람으로 활동했다. 여당인 민주정의당 소속 의원이었던 최 총장은 “헌법을 만들 때 국민의 기본권, 정치적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등 당시 야당의 주장을 100% 수용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상대방을 무조건 이기려 들면 혼돈과 무질서가 찾아온다”고 주장했다. 민주주의라는 정치 체제에서 다수의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은 특히 위험하다. 다수가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므로 소수의 의견을 전부 무시해선 민주주의를 제대로 구현하기 어렵다는 것이 최 총장의 설명이다.
최 총장은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를 예로 들었다. 나폴레옹 3세는 보나파르트 나폴레옹(나폴레옹 1세)의 조카로, 국민투표 결과 압도적인 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대통령 재직 중 쿠데타를 일으켜 공화정 체제를 붕괴시키고 황제에 즉위했다. 이후 나폴레옹 3세는 언론을 통제하고 국민들의 정치 활동을 탄압했다.
보다 제도적인 차원에서, 최 총장은 대통령 단임제의 한계를 지적했다. 그는 “대통령 단임제는 망국지제도(亡國之制度)”라며 “남미 정치사를 보면 중진국 대열까지 올랐던 남미 국가들이 단임제 채택 이후 전부 위기를 겪었다”고 힘줘 말했다.
그는 “대통령이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끝맺을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단임제에서는 제대로 일을 하기도 전에 임기가 끝나 다음 대통령 대에서 일이 금방 어그러진다”며 “5년 임기 중 대통령이 제대로 일할 수 있는 건 딱 1년뿐”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2년째부터는 사람들이 전부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될지 살핀다”며 “그러면 대통령은 자기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고 덧붙였다.
한국 사회를 뒤흔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도 대통령 단임제의 한계와 연관이 있다는 게 최 총장의 주장이다. 그는 “결코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아무런 권한도 없는 최순실씨에게 이것저것 물어본 것도 다 자기 마음대로 안 되니까 그런 것”이라며 “지금이라도 단임제의 문제점을 고쳐야 한다”고 조언했다.
최 총장은 관직과 정계 은퇴 이후 목포해양대와 서경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2008년 서경대 제8대 총장에 취임했다. 3년 임기의 총장에 4차례나 선임되며 어느덧 그가 처음 총장이 된 지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최 총장은 “처음에 총장 취임할 때는 걸려오는 전화의 90% 이상이 서강대 총장인 줄 알고 있었다”면서 “총장 취임 후 업적이라면 서경대를 널리 알린 것 정도”라고 웃으며 말했다.
언론인과 정치인, 관료, 교수, 대학총장. 게다가 국회의원 4선에 대학 총장까지 4선을 하는 등 전인미답의 길을 걷고 있는 최 총장에게 특별한 이유라도 있냐고 묻자 “내가 운이 좋았던 것 같다”는 소박한 대답이 돌아왔다.
최 총장이 이끄는 서경대는 올해로 개교 70주년을 맞았다. 1947년에 창학한 서경대는 ‘실용’과 ‘혁신’, ‘글로벌’과 ‘창의’를 기치로 그동안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그 결과 서경대는 ‘실용학문의 요람’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개교 70주년 기념 사업으로는 취·창업, 국가공헌 및 사회봉사 프로그램 마련, 한국을 빛낼 젊은 마스터 선정, 특별전시, 70주년 기념식(10월 22일) 등을 기획하고 있다.
최 총장은 “최근 교육부 4주기 일반 대학 교직과정 교원양성기관 평가에서 최우수 A등급을 받은 데 이어, 내년 상반기에 있을 2주기 대학구조개혁 평가에서 상위권 통과를 목표로 재학생 충원율 제고·졸업생 취업률 제고·전임교원 강의비율 개선·교수 연구업적 강화 등 평가지표별 교육개선 노력을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서경대는 이와 더불어 6대 핵심역량을 중심으로 교양 교육과정을 개편하고, 300여개의 비교과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다. 또 대학 교육의 체질개선을 위한 서경혁신원·미래연구원 설치와 글로벌 국제통상전문가·문화콘텐츠인재·뷰티인재 양성 프로그램 개발, 대학로 복합문화 캠퍼스 건립 등을 진행할 예정이다.
최 총장은 학교 시스템과 시설뿐 아니라 구성원 간의 관계 등 내적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도 노력 중이다. 그는 평소 교수들에게 “학생을 부자지간으로 대하라”고 강조한다. 교수가 학생을 친자식처럼 대하지 않으면 학생들이 ‘제대로’ 배우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는 “교수가 단순히 지식을 전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학생들을 사람다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인성교육에도 힘써야 한다”며 “친자식은 부모로부터 독립할 때까지 뒷바라지를 해주는데 학생도 마찬가지로 취업할 때까지 돌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최 총장 스스로도 취임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총장실 문턱을 없앤 일이다. 학생이건, 교수건, 직원이건 할 이야기가 있는 사람은 마음대로 총장실을 찾아와 이야기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그는 “책임은 내가 지지만 정말 학교가 망할 정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면 뭐든지 맡겨서 마음대로 하게 두는 게 좋다는 것이 내 학교 경영철학”이라고 말했다.
총장으로서, 아버지로서, 인생의 선배로서 서경대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냐는 질문에 최 총장은 “우리 학교가 창조적이고, 적극적이며, 경험을 갖추고,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나눔을 실천하라는 뜻으로 영문 앞글자를 따 만든 크레오스(CREOS)형 인재가 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최 총장은 한 가지 전제조건을 달았다. 바로 인성이다. 그는 “사람이 사람다워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라며 “학생들이 바른 인성을 바탕으로 크레오스형 인재가 되도록 돕는 것, 그게 우리 대학이 실용대학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끝까지 상식을 강조하면서도 실용을 함께 생각하는 유연한 모습에서 그가 어떻게 ‘1등 부럽지 않은 2등’으로 살아올 수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었다.
지원선 선임기자 president58@segye.com
◆ 최영철 서경대 총장 약력
△1935년 전남 목포 △목포고·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미국컬럼비아대 신문대학원 수료 △동아일보 정치부장 △9·10·11·12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 △체신부 장관 △노동부 장관 △대통령 정치담당 특보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 △목포해양대 객원교수 △서경대 석좌교수 △서경대 총장(4연임)
<원문 출처>
세계일보 http://www.segye.com/content/html/2017/02/24/20170224002531.html?OutUrl=na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