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광시성(广西省) 남단 도시
둥싱(东兴)을 아는
한국인은 많지 않다. 둥싱은 중국 대륙 남단 한 모퉁이에 조용히 박혀 있는 작은 도시다.
둥싱은 간단한 도시가 아니다.
우선 의외로 우리나라와 가깝다. 전남의
끝단 도시 고흥(高興)과 자매 도시다. 둥싱에 가면 쭉 뻗은 8차선 도로에 ‘고흥대로(高兴大道)’라는 도로 표지판이 붙어 있는 걸 볼 수 있다. ‘고흥’은 중국어로 하면 ‘즐겁다’라는 형용사다. 그래서 도로 이름도 ‘즐거운 도로’가 됐다. 둥싱
시민들이 이 길을 좋아하는 이유다.
둥싱 시내 [출처: 바이두바이커]
둥싱은 베트남과 코를 맞대고 있는 국경 도시이기도 하다. 둥싱에서 다리 하나만 건너면 베트남 북단 마을 몽카이다. 둥싱 시민들은
몽카이를 중국식으로 망제(芒街)라고 부르면서 친근하게 대한다. 위치
덕분에 둥싱은 국경 무역의 중심 도시가 됐다. 경제 규모는 우리나라 대도시에 견줄 만 하다.
둥싱 북쪽에 상급 도시가 팡청강(防城港)이다. 둥싱은 팡청강의
부속 도시다. 팡청강과 둥싱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이 지역의 중국 핵 발전의 새로운 메카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처: 셔터스톡]
2018년 5월24일.
팡청강의 전 언론은 핵 발전 기사를 1면 머리기사로 소개했다. 중국이 자체 개발한 제 3세대 핵발전 기술이 적용된 ‘화룽(华龙) 1호 핵 발전 설비’가
팡청강 제2기 핵발전소에 성공적으로 탑재됐다는 소식이다. 영국의
핵 발전 기술자들까지 몰려와 밤을 새면서 설비 안착 과정을 지켜봤다. 그리고 사흘 뒤 영국 기술자들은
중국의 핵 발전 기술자들과 노하우 교류를 위한 심층 세미나를 진행했다. 이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핵 발전 선진국으로서의 중국의 위상을 보여 주는 장면이다.
팡청강 핵 발전소 얘기를 더 진행하기 전에 중국의 핵 발전 기술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시기적으로 살펴보자.
다야완 [출처: 바이두 바이커]
다야완(大亚湾)은 광둥(广东)성 선전(深圳)시 북부에 있는 해안 지역이다. 중국의 핵 발전소 건설이 이 곳에서
태동됐다.
“다야완 핵 발전소 설비의 국산화율은 1%에도 못 미쳤다. 심지어 일상적인 재료, 즉 철근과 콘크리트조차 수입해야 했다. 단지 실험용 보일러만이 중국제였을 뿐이다.”
중국의 1세대
핵발전소 기술자인 궁광천(宫广臣) 팡청강 핵발전소 유한공사 부사장의 회고다.
당시는 개혁〮개방의 거센 물결 속에 주강(珠江) 삼각지(珠三角) 지역 경제개발건설이
신속하게 진행되던 때였다.
1978년 5월, 구무(谷牧) 부총리를 수행해 유럽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광둥성(广东省)의 왕취앤궈(王全国) 서기는 유럽에서 시찰했던 핵
발전소 모습을 떨칠 수 없었다. 광둥성 대야완에 꼭 핵 발전소를 짓고 싶었다. 이 때부터 왕 서기는 중앙 정부에 핵 발전소 건설의 필요성을 역설하기 시작했다.
1981년 마침내 중앙 정부는 11개 부처 연석회의를 열었다. 왕 서기의 핵 발전소 건설제안을 중앙 정부차원에서 본격 검토하기 위해서였다.
왕 서기는 “광둥성 서기를 그만두고 다야완에 내려가 핵 발전소를 건설하는 책임을 맡겠다”고 청원했다. 광둥성 최고 권력자 자리를 내놓고 건설현장 책임자를
맡겠다고 나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마침내 최고지도자 덩샤오핑(邓小平)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시했다.
덩샤오핑 [출처: 중궈칭녠왕]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우선 40억 달러의 공사비가 문제였다. 당시 중국의 연간 수출액은 206억4천만 달러에 불과했다. 보유 외화는
1억6700만 달러였다.
왕 서기는 독특한 제안을 했다. ‘빚을 내서 건설하고, 전기 팔아 빚 갚기’ 전략이다. 일단 은행에서 돈을 빌려 핵 발전소를 건설한 다음, 생산된 전력은 홍콩 등 부자 동네에 팔아 그 돈으로 빚을 갚겠다는 복안이다.
이 계획은 대성공이었다. 건설 후 국가계획위원회의 투자항목을 살펴보면 다야완 핵 발전소
건설에 들어간 투자액은 ‘0’ 위안으로 기록돼 있다. 은행
빚으로 건설하고, 전기 팔아 그 빚을 고스란히 갚았기 때문이다.
건설 과정은 험난함으로 점철돼 있다. 수많은 연구보고서, 셀 수 없는 협상, 몇번이 밤샘 토론을 거쳐 마침내 1985년 2월9일 광둥 핵발전 합영유한공사가 출범했다.
[출처: 셔터스톡]
1987년 8월7일
다야완 핵 발전소 반응로 설치를 위한 시멘트 양생 작업이 시작됐다. 중국 핵 발전의 첫 삽이 떠지는
순간이다.
핵심 설비는 물론 시계,
내화벽돌 그리고 나사못 하나에 이르기까지 전부가 수입에 의존했다. 수입품 물량이 워낙 많다
보니 선전시 관세청 관리가 다야완에 상주하며 수입품을 챙겨야 했다. 당시 중국은 핵 발전 분야에서 초등학생에
불과했다.
1986년 다야완은 전국적으로 100여 명의 인재를 모집해 프랑스와
영국으로 연수를 보냈다. 짧게는 수년에서 길게는 십 수년에 걸친 장기 연수다. 1인당 연수비가 평균 130만 프랑에 이른 것으로 집계됐다. 성인 남자 한 명의 체중에 해당하는 금값에 해당하는 액수다. 당시
이들 연수생이 ‘황금인(黃金人)’으로 불린 이유다. 1994년 5월6일 다야완 핵발전소가 마침내 상업 운행에 들어갔다.
다야완이 초석을 닦았다면 1997년에 시작된 링아오(岭澳) 제 1기 핵발전소는 중국 핵 발전사의 도약을 의미한다. 국산화율이 30%에 육박했기 때문이다. 링아오 2기에 이르러 국산화율은
64%를 기록했다.
2차 도약은 2009년 광둥 핵발전 합영유한공사의 후신인
중광허(中广核)가 ‘핵발전설비 국산화 연합연구중심’을 발족한 것이 계기가 됐다.
양장 핵발전소 [출처: 바이두바이커]
연구중심이 설계한 양장(阳江) 핵발전소는 중국 핵 발전 기술의 발전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양장 1, 2호 발전소는 2세대 기술인 CRP1000을 사용했다. 3, 4호에는 CRP1000+ 기술이 적용됐다. 그리고 5, 6호에는 3세대 기술인
ACRP1000이 사용됐다. 5, 6호 발전설비의 국산화율은 86%에 달한다.
천잉젠(陈映坚) 중광허 사장은 “CRP1000기 20대를 제작하는 데 2000억 위안을 투자했다”며 “이 덕분에 전체 관련 기업이 공동 발전하는 데 큰 힘이 됐다”고 소개했다.
현재 중광허는 관련
87개 기업과 함께 ‘핵 발전설비 연구중심’을
꾸리고 5400개 부품상과 함께 핵 발전 생태계를 꾸리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런 노력이 모여 태어난 것이 바로 5월 출범한 팡청강 2기 핵 발전소인 셈이다.
팡청강 발전소 [출처: 바이두바이커]
이제 중국은 시선을 해외로 돌리고 있다. 가격은 낮은데 효율은 뛰어난, 이른바 ‘가오싱자비’(高性价比-높은 가성비)를 앞세워 동유럽, 아프리카, 동남아 시장을 활발하게 개척 중이다.
동유럽 핵 전문가들은 “중국의
핵 발전소 기술은 ①열효율이 높고 ②인력에 의한 현장 점검이
가능하며 ③연료교체시기를 혁신해 연료 비용 절감은 물론 사용 후 처리비용을 줄일 수 있고 ④핵 발전 수명을 현재의 40년에서
60년까지 연장할 수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고 전했다.
중광허의 허위(贺禹) 이사장은 “하룽 1호
핵발전 설비 한 세트를 수출하면 여객기 200대를 수출하는 것과 같은 이익을 남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국내 5400개 부품업체의 해외 진출의 발판을 마련해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출처: 셔터스톡]
최근 중국은 영국 정부와 인재교육협정을 체결했다. 영국 대학생을 중국에 보내 핵 기술자로 교육시키는 협정이다. 외국에
유학생을 보냈던 1986년 시절과는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중국은 이제 제조(製造)에서 지조(智造)의 단계로
진화 중이다. 즉, 제품을 생산하는 국가에서 지혜 곧 소프트웨어를
생산하는 국가로 승격됐다는 얘기다. 핵 발전소 건설 중단 발표 우리나라의 풍경과는 사뭇 대비되는 모습이다.
핵 발전은 필요악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 없다고 기술까지 사장시킬 필요가 있을까. 발전소 하나 수출이 여객기 200대 수출과 맞먹는다면 우리의 미래 먹거리를 위해 이처럼 좋은 기회는 없다.
현명한 취사와 선택이 필요한 시점이다.
진세근
서경대학교 문화콘텐츠학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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